2016년 7월 8일 금요일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다"ㅡ(보완)







"또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있어 나이 매우 늙었으니 그가 출가한 후 7년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과부 된 지 84년이라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에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하나님을) 섬겼는데 마침 이 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구속됨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하였다"(눅 2:36-38). 하나님께서 이러한 안나 여 선지자를 기뻐하셨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실 때 몇 안되는 영접자들 중의 하나로 선정되는 은혜를 입도록 하신 것이다. 

오늘날 금식(禁食, 단식) 기도는 그 어느 때보다 절실히 요망된다. 초대 교회는 금식 기도하였다. 사이비 집단이 금식 기도를 강조하는 바람에 이를 의식적으로 기피하는 경향이 있으나 이렇게 되면 사탄의 궤계(책략-고후 2:11)에 말려듦이 된다. 장시간의 기도를 꺼리게 하고 금식을 달가워하지 않게 만드는 것이 그의 노림수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각 사람과 함께 사시는데(거-居-하시는데) 둘이든 셋이든 그 이상이든 그렇게 하나님을 모신 이들이 모이면 당연히 거기에는 예수님이 계심은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왜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이면 그 곳에 나도 있다"고 일부러 강조하신 것인가. 거기에는 분명 뜻이 있는 것이다. 마지막 아담께서 계시면 반드시 아버지께서 또한 계신다. 하나님께서 계시는 곳이 그 어디서나 성전(聖殿)이다. 성령을 모시고 있는 각 개인의 육체도 성전이고 이와 같이 친히 "거기 내가 있다" 하셨으니 "거기"도 성전이다. 그리고 우리는 각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왕과 제사장"(계 1:6/벧전 2:9)이다. 제물은 우리 자신이 고난 받는 것 자체가 그 역할을 한다. 우리가 초자연계 몸(삶의 향락을 위한)이 되어 있지 않고 모든 연약에 휩싸여 있어 갖가지 고난 고통의 표적이 되어 있는 자연계 몸 그대로 있는 것 자체가 이러한 필수 필연적인 고난의 대상이 되기 위해서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고자 하지 않는 그 자세가 바로 이러한 희생 제물로서의 마지막 아담과 하나가 되어 있음(다시 바꾸어 말하지만, 이러한 몸을 지니면서 이 세상에서 살고자 하는 것은 믿음이 없거나 배반하고 있다는 증거)을 의미하는 것. 즉 성전(하나님), 제사장(주님 자신께서 친히 대제사장), 제물 이렇게 3대 요소가 골고루 하나도 빠짐 없이 갖추어져 있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창조되었을 정도로 모든 피조물의 클라이맥스가 인간 창조입니다. 우주 천체도 인간과 관련되어 있습니다(신 4:19). 고로 하나님의 최대 관심은 당신입니다. 여러 인간을 똑같이 골고루 최고의 관심으로 대하심이니 당신도 그 중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고로 당신의 새 창조, 재 출생에 최고도의 관심을 기울이십니다. 그래서 죄인 하나가 회개하여 돌아오면 하늘에서는 천사들의 큰 기쁨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 정도입니다. 그리고 당신이 새로 창조되었으면 당신을 통해서 다른 인생들이 새 창조가 되도록 하는 일에 최고도의 관심을 기울이십니다. 세계 정세 등 이런 것에는 방금 지적한 구원 문제에 관련되어서만 관심을 가지십니다. 인생들의 새 창조를 위한 것뿐으로서 오직 이 일에 수반되어 일어나는 일들뿐입니다. 때문에 이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이 전파되기가 무섭게 이 세상은 곧장 종막을 내리게 된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 사실을 마음에 깊이 각인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이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빌 4:13)ㅡ모든 것을 할 수 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이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빌 4:13)ㅡ모든 것을 할 수 있다






1904-5년의 소위 "웨일즈 부흥"은 사이비 운동으로서
오늘날 혼란을 야기하고 있는 각종 사이비("방언 운동" 등)의 시작이 된다.
Evan Roberts 자신의 trini homo(3운법칙의 생애 다이어그램)도 이를 명백히 드러내고 있다.


2016년 7월 6일 수요일

21세기의 최대 경이(驚異, marvel)









초자연계 몸의 초능력이 과연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은
굳이 성경의 각종 기적을 들먹일 필요도 없다.
오늘날 'youtube(유튜브)'를 통해 악령들이 소위 UFO와
기타 온갖 초자연 현상을 통해 연출하는 것을 보면
그것으로도 충분하다. 식상할 정도로 넘쳐난다.
적 그리스도가 나타나면 그 클라이맥스를 이룰 것이다.





이 세상이 왜 있고 이 지상에 왜 인간이 있는지, 목적이 무엇인지ㅡ이 말씀 한 마디가 그 답이다






내일이라도 복음(사람이 영생하게 되어 구원 얻는 희소식, 복된 소식, 좋은  소식, 반가운 소식) 전파가 끝나면 끝나는 세상이니까

2016년 7월 4일 월요일

세상을 표면과 이면, 양면으로 보아야 제대로 바로 보는 것



(아래 뭉크의 그림을 약간 손을 본 것)




뭉크(Edvard Munch, 1863-1944, 노르웨이)의 그림
"절규(영역으로는 the Scream, 또는 the Cry)"
노르웨이 하늘은 북극권에 가까운 지형상 하늘이 저런 색깔을 띠는 것이 보통이라고 한다. 
죽음의 고독, 공포, 심적, 정신적 공황 상태를 나타낸 것이다. 


"네피림"(창 6:4)은 악령과 인간의 '튀기'(hybrid)로서 비록 사람은 되어 있으나 본질이 악령이므로 구원의 대상에서 제외되어 있고 죽으면 그 영혼은 정처 없이 방황하며 떠돌 수밖에 없어 바로 이들이 "귀신"의 정체이다. 악령과 다를 바 없으므로 인간을 다루기를 우습게 알고 마음대로 좌지우지한다. 그러나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일은 3운법칙으로 그 생명이 다한 인간에 한해서만 할 수 있는 일임은 물론이다. 욥기의 욥의 시험에서 보듯이 사탄 이하 악령들은 하나님이 허락 없이는 아무 일도 못한다.   
    
인간은 아무리 많아도 나와 똑같은 무기력한 고독한 존재로서 나를 둘러싸고 있는 것은 악령들과 네피림뿐이다. "거룩한 천사"들은 내가 마지막 아담께로 나아가려 할 때에만 막강한 초능력을 나타낼 뿐, 그렇지 않고는 철저히 나를 외면한다. 






이 세상을 대하시는 하나님의 낯빛은 진노ㅡ"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 아버지와 아들로 하나로서 계심과 똑같이 "사랑"(요일 4:16)으로서의 측면과 동시에 "소멸하는 불"(히:12:29)로서의 양면으로 계심을 알아야 합니다. 바로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롬 11:22)입니다.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실 것이다...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severity)가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kindness)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을 것이나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가 될 것이다" 한 것입니다. 모두 의인이고 거룩한 천사들만으로 남는다면 엄위가 물론 없겠지만 자유롭게 생각하고 판단하고 선택할 수 있음을 기화로 어긋나가 불법을 행할 때에는, 그리고 성경에 분명히 밝히고 있는 대로 여러 번 기회를 주시고 여러 번 타이르시고 게다가 오래 참으시고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고집을 부리고 도무지 들을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고 판단하실 때에는 모든 것은 180도로 달라집니다.

더 이상 기다림이 소용 없다고 보실 때 "아끼지 않으시고", "도끼로 찍어내시고 버리시게" 됩니다(눅 13:7/눅 3:9). 믿고 회개하지 않는 자도 그 대상이지만 믿음에 들어와도 처음 약속(회개)과는 달리 배신하는 경우 사정은 마찬가지입니다. 고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들에게도 "내 안에 거하라 그러면 나도 너희 안에 거할 것이다"(요 15:4)는 약속과 동시에 경고의 명령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열매 맺음에 대하여 강조하시면서 경고하신 말씀입니다. 아무리 나 자신은 믿는다고 해도 성경대로 믿지 않고 경고를 받지 아니할 때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결국 행함으로 구원되는 것이 아니냐?" 한다면 그것은 "구원, 믿음, 은혜" 자체를 잘못 알았기 때문입니다. 잘못 배웠고 잘못 가르친 것입니다. 남 탓할 것도 없고 나 자신이 두드리고 찾지 않고 구하지 않은 허물이 역력하니 어디다 하소연할 데도 없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들은 것에 대하여 우리가 더욱 관심을 집중해야 할 것이니 혹 새어 나가듯이 떠나 버릴까 염려하라. 천사들로 하신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 모든 범죄함과 순종치 아니함이 그 마땅한 보응을 받았거든,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피하리요"(히 2:1-5) 함과 같습니다.

"이 구원은 처음에 주님이 말씀하신 바요 그 들은 자들(사도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로서 하나님도 큰 기적들과 여러가지 능력과 및 자기 뜻을 따라 성령의 나눠 주신 것으로써 저들과 함께 증거를 보이셨다" 했으니, 오늘날은 성경이 밝히고 있는 대로의 3운법칙과 3위1체의 원리도 추가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에는 특정인을 지도자로 생각하고 그들을 따른 것이 허용되었지만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고 친히 그 위치에 영원히 계시므로 하나님과만 직접 상관할 일이요 또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되도록 모든 것을 확립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성령(아버지와 하나되어 계시는 아들) 친히 성경을 가르치시고 친히 교회를 지도하시는 시대가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써 시작된 것입니다.

초대 교회 사도들의 임무였던 말씀 전달은 이제는 성경으로 집약되어 있고 이 말씀으로 충분합니다. 고로 교회 내에 목자(성경상의 명칭대로 "장로, 감독")의 역할은 초대교회에서 가르친 대로 먼저 믿음에 들어 와 남들에게 전도하여 모은 여러 사람들의 본이 되어 있는 이들의 몫입니다. "본"이지 특정인에게 특정의 "가르침"의 전권이 부여되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가르침은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오직 본을 보임에서 목자(牧者) 구실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일에 "으뜸이 되는"(요삼 1:9) 또는 주동이 되고자 함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내 영혼은 내가 챙겨야지 어느 누구에게 의뢰하든 그것은 자살행위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위하려는 가운데에서만 나도 위함을 받고 챙겨 줌을 받는 것입니다. 성도들을 위하여 기도함이 그런 이치입니다.

하나님을 사랑이시라 일방적으로 이해하여 오해하기 쉽습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시 7:11)이시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사람이 회개치 아니하면"(:12) 무자비한 처단밖에 돌아오는 몫이 없습니다. 이 세상을 대하시는 하나님의 낯빛은 사랑과 자비와 은혜의 인내의 모습이 아니십니다. "아들을 순종치 않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다"(요 3:36)고 말씀하신 대로, "진노"입니다. 오직 이런 세상을 위하여 해산의 수고로 기도하는 이들에게만 하나님이 모습은 무한 자비의 십자가 고난을 지시던 때의 그 사랑이십니다. 지금도 그렇게 기도하시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기도하는 자들을 오늘날 찾으십니다. 오늘날 이 하나님의 진노 앞에서 마치 그 앞에 바쳐지는 희생 양처럼 되어 세상을 위해 사람들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울부짖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세상 사랑은 나타나 계십니다.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신다고 편안하게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하심과 동시에, 말할 수 없는 해산의 고통으로 우리 위해 기도하시고(롬 8:26) 그리고 고난 받는 그 몸된 교회를 통하여 고난 중에 계시는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측면이십니다. 아들과 하나되신 아버지의 모습 역시 마찬가지이십니다. 

새 피조물로서의 새 생명은 새 인식, 새 관점의 전적(全的)인 인간 삶의 천지 개벽을 뜻한다




3위1체 법칙을 따라 된 인간의 구조는 영혼과 육체이다. 영물(에덴 낙원의 "짐승")들은 지상 동물과 그런 구조로 되어 있는 것이다. 만일 인간이 범죄로 인해 자연계 육체로 영구 정착되지 않았다면 영물(악령)들이 초자연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건드릴 수도 없고 따라서 "네피림"이란 것이 생길 리도 없다. 아담이 범죄하지 않았다면 영혼과 육체의 이중 구조로써 영원히 초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죽음 없이 행복하게 살게 되는 것이었다. 인간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은, 한 번 범죄함으로써 죽은 자 즉 영생하지 못하는 자연계 육체로 남을 수밖에 없는 운명에 떨어졌으므로 하나님(아들) 친히 사람이 되심으로써 우리 각자와 이 3위1체 원리로 하나되심으로 된 필연적 결과다. 즉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인간의 비극적 결과를 전화위복시키는 방편으로 하나님의 아들되게 하심으로써 이루신 것이다.

전화위복이라는 것은 독생자(홀로 한 분이신 외아들) 외에 많은 아들을 얻으셨다는 것인데, 이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방법으로 그렇게 되었다는 것일 뿐 처음부터 많은 아들을 얻고자 하심은 아니었다. 다시 말해 모든 것을 합리적으로 원리원칙 아래 공평공정하게 이루신다는 뜻이다. 우리로서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지 않았어도 초자연계 몸으로 얼마든지 영원히 행복하게 살게 되어 있고, 또한 영물들 중에 거룩한 천사와 악령들로 구분이 생겼듯이 우리 인간도 초자연계 몸으로 살면서 의인과 악인으로 자연스럽게 나누어져, 하나님의 대리자로서의 아담(범죄하지 않았다면)의 심판을 받아 악인들은 악령들과 함께 영원한 형벌을, 그리고 의인들은 거룩한 천사들과 더불어 영원한 복락(福樂)을 누리게 되어 있는 것이었다. 어차피 악과 선으로 나누어지게 되어 있었으니 완전한 자유 의지(자유 선택권)를 주셨기 때문이다.

3위1체의 원리로 계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모습으로 계셨기 때문에 그 계시는 모습을 따라 만물을 만드셨으므로 만유의 법칙으로서의 3위1체 원리가 탄생, 작동하게 된 것)으로서의 아버지와 아들께서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한 대로 하나로 계심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함은 이 원리로 계심을 가리킴이다. 또 이 원리로 만물을 지으셨으므로 사랑으로 지으셨다는 뜻이요 만물을 이 사랑의 법칙을 따라 전적으로 위하신다는 의미이다. 이와 같이 하나로 계시니 아버지와 아들로서의 두 분이시지만 둘이시라 하지 않고 언제나 "하나"로 표현되심이니 아들의 모습, 아버지의 모습이 따로 있으심이 아니라 아들이 곧 아버지의 형상으로서 아들의 모습이 곧 아버지의 모습이신즉 또 그 모든 말씀이시므로 이에 대해 헷갈림이 없어야 하는 것.

형상과 실체의 관계이시니 우리로 치면 영혼과 육체 관계로서, 이제는 우리도 우리의 영혼과 육체를 다시 '육'으로 삼고 성령(아버지와 하나되어 계시는 아들)을 그 '영'으로 모셔 새로운 하나 관계로서의 3위1체의 원리로 존재하게 되었으니 곧 "새로운 피조물"이다. 물론 영원 멸망에 처해지게 되는 악인들은 이런 모습이 아니다. 그냥 처음 그대로의 영혼과 육체라는 이중 구조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새로운 이중 구조인 것이다. 마지막 아담(예수 그리스도-고전 15:45)과 하나되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금 내가 어떤 사람을 대할 때 영혼과 육체로 따로 보지 않고 보는 것은 육체만을 대하나 그 안에 있는 영혼을 동시에 상대하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를 대할 때 보는 것은 한 사람이지만 동시에 그 안에 그와 하나로서 계시는 그리스도를 함께 대하는 것이다. 이렇게 모두가 균등하게 평준화가 되어 있으니 크고 작은 자로서의 구별은 있되 진정한 평등인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대할 때에도 형상이신 아들을 대하는 것이나 동시에 그 형상의 실체로 계시는 아버지를 상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점에 대해 조금도 혼동을 느낄 필요가 없다. 아버지와 아들로 계신다고 해서 누구를 상대함이냐 하고 어렵게 생각할 아무 이유가 없다. 그렇다고 어떤 때는 아버지께서 되시고 어떤 때에는 아들께서 되시는 등 번갈아 나타나심도 아니다.

언제나 하나로 계심이니까 우리가 대하기는 아들(형상)이시지만 그 안에 계시는 아버지(실체, 우리로 치면 영혼)를 대하시는 것이므로 "아버지"라고 불러도 아들과 하나로 계심인즉 아들을 대함이요, 아들을 상대로 하여 "주님"이라 불러도 그 실체로서 아들과 하나로 계시는 아버지를 대함이다. 고로 한 형상을 상대하는 하나님이시니 둘로서 또는 두 모습으로서 계시는 것이 아니다. 빛이 파동성과 입자성이라는 두 가지의 전혀 별개의 성질로 되어 있어도 빛 하나로 상대하는 것이다. 그것을 입자성으로만 상대해도 틀린 것이 아니니 파동성을 함께 함유하기 때문이요 반대로 파동성으로만 보아도 틀린 것이 아니니 입자성도 함께 취급되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지금부터는 이런 '둘로서의 하나', '하나로서의 둘'이란 개념에 익숙해져야 마땅하다. 나의 구원의 이치가 이 3위1체 원리의 둘의 하나됨으로 인한 것이라 함은 그리스도와 내가 별개요 각각 독립된 개체이지만 그를 성령(아버지와 하나되어 계시는 모습)으로 내 안에 모심으로 둘이 하나되어 있는 이치를 따라 그 죽음이 나의 죽음, 그 부활이 나의 부활, 그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심은 내가 그렇게 하나님 우편에 앉아 있음이 되는 엄연한 사실, 그 현실을 따라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갑과 을이 둘이서 하나되어 있는 구조가 반드시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하는 관계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판단해도 납득이 가고도 남는 일이다.

이유는, 갑은 갑대로 을은 을대로 자기 소견을 따라 움직이면 어떻게 하나로서의 모양을 취하겠느냐 하는 것이다. 이를 잘 설명하는 것이 몸과 머리의 관계이니 몸 따로 머리 따로 논다면 어찌 그 둘이 한 몸의 체제와 형상을 갖추겠는가. 이와 같이 모든 이치가 명약관화이다. 그래서 나를 위하지 않는데 따라서 죄라는 것이 아예 원천 봉쇄되어 있는데 "어찌 죄 속에 거하리요, 살리요"(롬 6:1,2), 어찌 죄를 짓겠느냐 하는 것이다. 이 이치를 모르고 혹은 따르지 않기 때문에 오늘날 소위 기독교의 각종 부패상이 노정되는 터이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은 양심이라는 불문율의 (하나님의) 계명이 있기 때문에 전전긍긍하는 맛이라도 있지만, 소위 하나님을 알고 믿는다는 이들은 양심마저도 무시하려 들므로 소금의 맛을 나타낼 수 없는지라 세상으로부터 가장 지독한 이기주의자라고 욕을 듣고 있는 것이다. 말씀을 처음부터 아주 잘못 배워 온 것이다. 이제는 이런 무지는 용납되지 않는다. 또 이와 같이 하나님을 내 안에 모시고 있는데 "마리아"라는 전혀 이치에 맞지도 않는 그야말로 당치도 않은 존재가 내게 무엇 때문에 필요하다는 것인가. 이것이 일반적으로 오늘날의 "기독교"의 현주소다. 때 늦기 전에 크게 각성할 일이다.

"모든 사람은 혼인을 귀히 여기고 잠자리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실 것이다"(히 13:4).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 숭배(탐욕도 우상 숭배-골 3:5)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동성 성행위(click)자나 도둑이나 탐심이나 술 취하는 자나 욕하는 자나 약탈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 받지 못한다"(고전 6:9,10)고 서릿발 같은 성경의 경고 앞에서도, "은혜로, 믿기만 하면 구원"이라는 대목을 자의적으로 해석해 버린 소위 교회의 "대신 죽으심"이라는 "전통적 해석"을 무비판으로 수용하여 정작 성경은 외면해 버린 것이다.


동성 성행위(click)자를 두고도 "인권, 운운"하니 기타 모든 불법 행위자들도 박해 받는 "소수자의 인권" 차원으로 덮어주려는가! 총체적으로 자아중심 일색이니 자기 부인이 없음은 당연하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이 아니라 세상 종교의 교인만 되었을 따름이다. 이 세상이 악마에게 지배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 최소한 세조 앞에서의 단종 폐위의 불의에 대한 사육신의 의분과 기개만이라도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임금의 분부를 받들고 파송되었으면 왜국에서 보인 "나는 신라의 개 돼지는 될지언정 왜국이 신하는 되지 않겠다"고 일갈한 박제상의 충의의 의지만은 있어야 하지 않는가. 사탄이 아담의 나라를 찬탈해 이 세상에 불의로 군림해 있음을 안다면 만주 벌판에서 말 달리던 독립 투사의 선각자, 선구자의 의기만은 살아 있어야 하지 않는가. 실제 가치를 따지자면 이 모든 것보다 정작 중요한 것이 하나님의 사업이 아닌가. 






2016년 7월 2일 토요일

이 세상에 "신비'나 "불가해"나 "미지의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늘날 영적(靈的)이고 초자연적인 것에 대해 그 어느 시대보다 요란하게 부산을 떨고 있음이 역력하지만(이것이 당연함은 지금은 적 그리스도의 시대로 접어들기 때문), 우리는 단순히 괴기스러운 것에 대한 호기심을 유발시키는 것이 목적이 아니며 초자연계 '현상'에 대해 관심을 고조시키자는 의도도 없다. 다만 초자연계의 '존재'를 3위1체의 원리에 의해 확인하라는 촉구요 경고일 뿐이니, 사탄 등 악령들의 속임수를 성경대로 간파하여 그들의 꺼둘림에 휘둘리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다.

"도대체 악령들은 자기 정체를 감추는 것이냐 아니면 드러내려는 것이냐 어느 쪽이냐" 하는 의혹을 품을 필요도 없다. 그들은 인생들을 속여 영생하지 못하도록 함이 유일의 목적이므로 이를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뿐이요 이 외에는 그들로서도 아무런 관심이 없다. 인간의 경배를 받자는 것도 이 시점에서는 부질없는 것임을 그들 스스로 잘 알고 있다. 그들도 사활이 달린 문제라고 딴에는 판단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아는 고로 이런 단언이 가능하다.

성경에서도 많이 언급되는 각종 귀신 현상은 인생들을 속이는 방법 중의 하나이기 때문에 지금까지 거침없이 악령들이 활용해 온 것이다. 초자연계를 드러내자는 것이 아니었다. 이제까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귀신들의 출몰은 모르는 곳이 없을 정도로 널리 알려져 있고 또 빈발했지만 초자연계에 대해서는 전혀 무지 상태에 있었음이 그 증거다. 우리 역시 그런 것에 편승해서 어떤 득을 보자는 것이 아니라, 모든 현상을 성경대로 정확히 해석하여 인생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의 위치를 확립하자는 데에만 뜻이 있다. 즉 초자연계의 존재를 성경대로 명확히 알림이다. 따라서 UFO를 비롯한 모든 초능력 현상은 자연계와 병립해 있는 초자연계 현상으로서만 모두 휩쓸어 한데 묶어 버리고 그로써 뚜껑을 아주 닫아 버리고 그 이상으로 필요 없이 관심을 갖지 말라는 것이다.

더 이상 관심을 가지게 되면 시간 낭비에 그치지 않고 그들의 페이스에 말려들게 된다. 이것은 악령들의 전략 전술의 일환이기도 하다. UFO도 그런 목적에서 속임수를 나타내는 악령들의 흉계일 뿐이니 외면해버리고 백안시할 일이다. 이 세상에 "신비'나 "불가해"나 "미지의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모르니까 즉 이제까지는 초자연계가 있음을 인지하지 못한 까닭에 그런 용어가 통했으나, 이 우주의 모든 이치는 단순한 대칭성 원리로 짜여져 있어 너무나 간단 명료하다. 고로 오직 중요한 것은 사람이 다시 출생하고 새로 창조됨으로써 그 옛날 영생하도록 창조되었던 원 위치로 복귀함 외에 달리 있을 수 없으니 그 이상으로 어떠한 관심도 가질 이유가 없다.

초자연계가 미지(未知)의 세계일 수는 없다. 자연계와 양립되어 있는 그 '존재'를 알아 놓았으니 그 '내용'은 몰라도 되는 것은, 지금은 구원이 시급하여 다시 출생하고 새로 창조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니 때가 되어 초자연계 몸으로만 복귀되면 그 모든 궁금증은 당장 해소되기 때문이다. 실상 이 자연계 몸의 지능 가지고는 초자연계에 속한 수학(數學)을 푼다는 것은 한 마디로, '능력의 한계 밖'이다. '보이지 않는' 초자연계 육체로 스스로를 변환시키게 될 그 때에나 풀게 될 것이다. 고로 초자연계 존재를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지금은 족하다. 자연계와 초자연와의 차이는 인간과 침팬지의 차이에 비유할 수 있다. 초자연계에 대해 알기를 바란다는 것은 침팬지에게 미적분을 풀라고 하는 것과 같다. 침팬지는 인간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은 초자연계 존재가 될 수 있다. 이유는 처음에 초자연계 존재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고로 인간은 진화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퇴화한 것임을 명심할 일이다. 초자연계 존재로 있다가 자연계 존재로 전락해버렸기 때문이다. 만일 인간이 자연계 존재로만 만들어졌다면 영원히 영생하기는 틀린 것임을 알아야. 왜냐면 하나님의 일사부조리는 다시 무엇을 고쳐 하시는 일이 없는 까닭이다. 다시 말해 그것이 최고로 좋아서 그렇게 만드신 것인데 이를 번복하여 다시 만드신다는 것은 자신을 부정하시는 의미밖에 더 되지 않는다. 따라서 인생이 구원되어 영생하게 된다는 것은 처음부터 영생하는 존재로 있다가 범죄함으로써 플 잎의 한낱 아침 이슬 같은 덧없는 자연계 존재로 되었기 때문이니, 원상 복구 차원에서의 인간 구원인 것이다. 

인간만 아니라 동식물도 인간으로 인하여 땅이 저주를 받았음이 창세기 기록으로 밝혀진 이상에는 "진화할" 수가 없다. 더 나아져 간다는 뜻으로 "진화"를 말하는 것이니까, 자연 과학적 법칙을 말함이 아니라 그야말로 소설을 쓰는 것일 수밖에. 인간처럼 오히려 "퇴화"되어 버렸다면 그것만은 말이 될지는 몰라도ㅡ. 저주 받은 상태에서의 지상(地上) 조건을 따라 거기 맞추어 생존해 가자니까, 자연계에 속한 인간이 이런 자연계의 제약된 환경에 맞추어 인지에 의해 여러가지 개발된 문명의 이기(利器)를 만들어 쓴다고 해서 한껏 기고만장해 있는 것처럼, 동식물 역시 저주 받은 당시와 대비해 볼 때, 부분적으로 진화인 것처럼 보이는 미미한 환경 적응을 나타내 보였는지는 몰라도. 저주를 받는 순간 동식물 역시 거의 죽음에 가까운 상태로 되어버렸다고 상정(想定)해도 좋지 않은가, 그런 뜻의 얘기다. 그것이 서서히 아주 서서히 저주 받은 환경이나마 그래도 살아 남기 위해 조금은 생존하기 좋도록(인간이 자연계 존재가 되어버렸으므로 그것도 인간을 위해서 인간과 보조를 맞추어) "나아진"(進化) 것이 아니냐 하는 것이다. 

모든 문제를 이제부터는 3위1체의 원리를 토대로 하여 풀 일이다. 인간 생애를 철통 같이 좌지우지 하는 3운법칙도 그것이 하나의 독립된 실체(entity)라고 하여 3위1체의 원리 도식 그대로를 반영하고 있는데 하물며 인간 외의 생물에 관한 일이랴. 3위1체 원리의 지배를 받지 않을 리가 없다고 판단해야 정상적인 인간의 이성이요 지성이다. 3위1체의 원리가 그 근간인 대칭성 법칙을 따라 초자연계의 실존을 증명하고 있는 까닭이다. 그런 초자연계의 실체에 대한 증거가 오늘날 내로라는 듯이 여봐라는 듯이 마구 연발해내고 있는 소위 ufo 및 그와 관련된 소동들이다. 


초자연계에 대해 너무나 무식하여 그 존재조차 부정하기 때문에 자연과학자들이 이런 실체에 대해 눈 가리고 아웅하는 식으로 나올 수밖에 없다. 억지가 대판인 그런 자세는 과학자로서의 태도가 아니다. 인정할 것은 인정하라. 성경에서 밝히고 있는 이 3위1체의 원리를 따라 풀어 나가면 얼키고섥힌 모든 실타래가 신기하게 절로 제 가닥을 찾아 나가게 될 것이다. 경고하거니와, 3위1체의 원리를 따라 초자연계를 인정하지 않고는 결단코 이 세상 신적(神的) 존재인 악령들의 속임수에서 해방되지 못하고 처참한 지적 노예로 비참한 말로를 맞게 될 것임을 단언하는 바이다. 지금은 시대가 다르다. 벌써 오래 전에 이런 시대가 도래할 것이었지만 제 때에 나타나도록 "막는 자가 있어"(살후 2:7) 오늘에야 나타나게 된 것뿐이다.  

"네가(내가) 누구냐?"ㅡ"위대하신 "마지막 아담"의 '이름'으로 일컬음 받는 존재이다"




"그러나 너희는 '랍비(스승)'라 칭함을 받지 말 것이니 너희 '선생'은 하나이요 너희는 다 형제다. 땅에 있는 자를 '아비'(사회적인 넓은 의미에서의)라 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는 하나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이다.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 것이니 너희 지도자는 하나로서 곧 그리스도다.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할 것이니,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질 것이다"(마 23:6-12).

그런 모든 명칭과 관념은 하나님을 모르고 지내던 지나간 시절의 유산이요 잔존물이다. 하나님의 아들 친히 사람이 되시어 세상에 오심으로써 "하나님"을 똑바로 가르치신 것이다. 하나님 친히 우리의 머리로서 그 모든 것이 되시는 까닭이다. 머리의 역할은 몸의 모든 지체 각 부분과 직통, 직결됨에 있다. 다른 그 무엇 그 어떤 제3자를 통하지 않는다. 제3자가 존재한다면 3위1체의 원리가 아예 생겨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선생', '지도자', '아버지' 등의 위치는 오직 머리의 역할에 한한다. 그것으로 족하고 그 이상 필요로 하지 않는다.

우리 각자가 모두 머리로서의 마지막 아담을 성령으로 모시고 있음이 그 이치이다. 고로 아무리 지극히 작은 자라도 그 안에는 최고로 높다고 인정되는 자와 똑같이 하나도 틀리지 않고 차이도 없이 똑같은 성령이 계심으로써 마지막 아담이신 머리를 모시고 있은즉 이야말로 진정한 평등이다. 그러므로 어떤 차등도 계급도 지위 고하, 우열도 없이 오직 '몸과 머리' 관계뿐이다. 하나님이 계시는지도 몰랐고 알아도 그저 막연하기만 했을 때에는 사람(하나님 대신)이 지도자요, 선생이요, 아비인 줄 알아 우러러보았을 뿐이다. 그러나 이제는 완전히 다르다. 인식부터 싹 바꾸고 갈아치워야 하는 때이다. 청개구리처럼 하라는 것은 안하고 하지 말라는 것은 철저히 골라서 하듯이 이러한 성경의 가르침에는 아랑곳 않고 "교부(敎)", "신부(神)", "목사(牧)"ㅡ이런 식이니 인간의 아둔한 고집도 알아 줄 만하다. 버리지 못하는 옛 인습적 사고 방식 때문이다.

무슨 말이냐 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 안에서는 모두가 주인 의식으로 나가야 하는 때이니, "나는 못해, 나는 자격 없어, 할 만한 사람만이 하게 되어 있고 나는 아냐"ㅡ 이런 식의 소극적이고 피동적인 사고방식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 시대다. 마지막 아담 인에서 그렇다는 얘기다. 세상 사람들이야 머리되시는 하나님부터 외면하니 논급할 것도 없다.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신다(갈 2:20). 그러니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는"(빌 4:13) 것이다.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자신의 구원을 이루라"(2:12), 그리고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함으로써 멸망에 이른다"(3:18,19)는 "많은 눈물"의 경고가 나와 있는 바울의 똑같은 편지에서 이런 말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온 것은 당연하다. 같은 의미이기 때문이다.

내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일이니 그래서 내가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내가 소위 종교 개혁자가 될 수 있고 아무개 하면 다 알 수 있는 그런 능력의 부흥 강사, 전도자, 기도자 등 얼마든지 그런 일들을 할 수 있는 것이니, 남이 위대한 일을 했으면 그 일은 그 자신이 한 일이 아니요 그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이므로 오늘 이 시대에 처한 나도 당연히 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 우리가 말하는 "믿음"인 것이다. 이는 나도 제일인자가 될 수 있다는 이유도 근거도 밑도 끝도 없는 야망이나 패자(覇者) 심리와는 아주 다르다. 자아중심이 아닌 그리스도 중심이기 때문이다.

"으뜸이 되려는"(요삼 1:9) 심뽀는 사탄에게 속한 것이요 멸망의 지름길이다. 오직 주인을 섬기는 사랑의 종의 위치에서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는 의식 개혁을 말한다. 그것이 큰 자의 일이든 작은 자의 일이든 꼬리의 일이든 심장의 일이든 개의할 바 아니다. 머리께서 친히 하시는 일이므로 그런 위치, 역할의 종류가 내게 아무 상관이 없다. 오직 몸의 역할에서 필요 불가결한 존재로서의 임무를 충실히 함이니 이를 가리켜 주님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고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룸이 나의 먹을 양식"(요 4:34)이라 하신 것이다.

먹지 않으면 죽는다. 우리가 구원 받은 것이 보내심을 받는 의미인 것이다(요 20:21,22). 내가 죠지 뮬러(George Muller)가 될 수 있고, 내가 송상절(宋常節)이 될 수 있고, 석자직(石子直)이 될 수 있고, 헛슨 테일러(J. Hudson Taylor)가 될 수 있고, 기도자 하이드(Praying Hyde)가 될 수 있고, 찰즈 피니(Charles Finney)가 될 수 있는 것이다. 홀리 앤(Holy Ann, Ann Preston)의 기도 능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하는 주인공이 될 수 있는 것이다. 1907년 한국 교회 부흥을 일으킨 장감(長監) 선교사들의 정오(正午) 기도회의 주역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미국의 1857년 기도회 부흥(Fulton Street Noonday Prayer Meeting)의 도화선이 된 그 중심 인물이 얼마든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주체 의식은 '대표(代表) 의식'에서도 나타난다. 남 탓으로 돌리지 않고 나의 탓으로 여기는 겸허한 자세다.  



천하무적의 강자가 유일하게 싸움에 져 다시 일어나지 못하게 되는 책략을 원수는 노린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머리와 몸으로서의 한 몸' 체제에 있으면 그 삶은 영원히 공인(公人)의 삶이니 공동체 의식이 이런 공인 정신을 말함이다. 다시 말해 그 누구도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이가 없기 때문이다. 자아중심은 사적인 것이고 사사로운 개인주의이기 때문에 공인으로서 이런 사인(私人)의 행동을 취하는 이는 공직사회에서 퇴출되어 마땅한 것이다. 인간 사회에서는 거의 모두가 자아중심이어서(그리스도 안에 있어 자기 부인을 하는 이들을 제외하면ㅡ자기 부인 자체가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불가능) 그런 사인 행동을 어느 정도 용납하고 눈감아 주는 것이 보통이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절대로 용인되지 않는다는 것이 특징이고 차이이다. 이유는 최고 무비의 막강한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들로 삼으셨기 때문이다. 

천하 무적으로 세우셨기 때문에 대적할 자가 없다. 그러므로 당연히 요구되는 것은 스스로를 강한 자로 만듦이다. 하나님께서 강한 자로 만드신 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 스스로를 강한 자로 만들어야 그렇게 강한 자가 되게 하신 것이 비로소 의미가 있기에 그러하다. 다시 말해 내가 나를 강하게 할 때 내 힘으로 나를 강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능력은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 것으로서 작용한다는 뜻이다. 이것이 3위1체 원리의 양면성과 동시성이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사는(영원히) 자'로 만드셨으면 아담 스스로 그 생명을 보존할 책임이 있는 것이다. 처음부터 초자연계 존재로 만드신 영물 역시 마찬가지다. 그 스스로 자기를 지키도록 되어 있는데 아담이나 사탄 등 악령들이나 자기 본분을 망각한 것이다. 그래서 죽음에 이르렀고 또는 영원 멸망에 이른 것이다. 

우리가 구원을 받았지만 스스로 우리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야 한다는(빌 2:12) 의미가 이런 차원에서 이해하면 간단하다. 지금 이 세상은 우리의 이러한 역량을 시험하는 때로서 아주 적합한 곳이다. 우리 자신의 역량이 아니라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하나님의 것으로서 하나님의 능력을 가지고 그것을 오직 제대로 활용한다는 의미이니 그것도 제대로 할 수 없다면 그러면 인간 로봇을 하나님이 지으셨다는 의미가 아닌가. 그래서 사랑에서는 자유 의지가 핵심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렇게 창조하시지 않았는데 자기 스스로를 로봇으로 만들어 놓는 것이 모든 자아중심의 결과요 말로이다. 제 것 두고도 쓸 줄을 모르는 그런 무익하고 백 가지 해악뿐인 자는 아예 창조하시지도 않았을 것이요 그런 자들은 방치해두실 리도 만무하다. 세상에, 그런 어리석은 자도 다 있다는 말인가! 그러나 그런 어리석음을, 사탄을 비롯한 악령들이 자행해 왔고 인간(아담)은 거기 물들어 오늘날 사탄 아래 스스로를 종살이 하도록 만든 것이다. 

스스로를 강하게 한다는 것은 물리적인 힘으로가(사탄은 그런 힘으로 육박, 압박해 오는 대신ㅡ욥기에서 욥을 상대로 함에서 입증되었듯이) 아니라 정신력 즉 신념을 굽히지 않고 절조를 지키는 데에서 발산되고 발휘된다. 우리의 본이신 마지막 아담께서 십자가에 죽으심도 불사하신 데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세상 보기에는 약자의 죽음이셨지만(고후 13:4) 사탄은 이 때 완전히 패배한 것. 사탄 역시 이를 알고 있었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내려오시도록 온갖 수작을 다 부린 것이나 그리스도께서는 그 위치를 사수(死守)하심으로써 영원한 승자가 되신 것이다. 즉 아버지께 대한 사랑, 우리 인간에 대한 사랑이 그 승리의 원동력이셨던 것.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고후 12:10)이라는 그리고 "날마다 죽는 것을 자랑"(고전 15:31)으로 삼는 인류 초유의 일대 혁변이 일어나게 된다. 우리 역시 이렇게만 되면 모든 일은 끝난 것이요 하나님께서 우리 위해 막힘 없이 손을 쓰시는 단계를 우리 스스로 이루어 드림이다. 우리 스스로 "하나님을 제약하는"("to limit the Holy One"(시 78:41) 것과 대조되는 정반대의 국면이다.    

UFO가 사실이냐 아니냐가 문제 아니다. 첫 사람 아담 때부터 그(아담)가 범죄하여 이 자연계 몸으로 영구 정착한 때로부터 시작해서 인간들과 함께 살고 있는 영물들인 것이다. 어리석은 인생(초자연계 존재인 악령들과 도무지 상대가 안되는지라 일방적으로 당하고만 있는)들을 농락하여 가장(假裝)한 형태로 저 짓거리들을 하고 있는 것이다. 거룩한 천사도 아니고 악령들이다. 거룩한 천사들은 인간과 함께 살지는 않고 천상(에덴낙원)으로부터 이 지상의 인간 세계로 번개 같이 오르락내리락 움직이는 것뿐이다.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인간 구원과 관련된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악령들도 물론 같은 영물이니까 번개 같이 움직이나 인생들을 멸망시키기 위해 즉 어찌 하든 구원 얻지 못하게 전력을 다하는 것만이 다르다. 완전히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는 무리들이다. 그래서 마치 멀리 저 멀리 성단(星團)에서 온 것처럼 그리하여 외계인으로 자처하고 인생들을 속이는 짓거리는 가소롭고 가증스러운 것이다. 실제는 바로 코 앞에 있는 자들이다. 단지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니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하는 꼴이다. 보통 낭패가 아니다. 원수 관계에 있는데도 상대는 우리를 보지만 우리는 그들을 보지 못한다. 뿐만아니라 초자연계의 초능력과 자연계의 무기력의 차이다.

그들은 우리 몸뚱이를 충돌하여 마음대로 지나갈 수 있으나 우리는 이를 느끼지도 보지도 못한다. 이런 초능력으로 인간들과 이 세상에서 세상이 시작하던 바로 그 때부터 함께 살아 온 것이다. 이런 초능력은 부활하신 마지막 아담께서 부활하신 후 여실히 입증해 주신 터이다. 사람으로서는 첫 사람 아담 이후 유일하게 보이신 사례다. 아담이야 우리가 나기도 전에 그런 능력의 몸을 상실했으니 논외로 치고라도ㅡ. 지금은 천하가 다 알듯이 UFO로 가장해서 악령들이 까불거리고 나대니까 이런 말도 할 수 있는 것이지 그 전 같으면야 초자연계가 무엇인지 초능력이 무엇인지 생각하기조차도 꺼려했을 일이다. 이런 말을 하면 완전히 정신이 나간 사람으로 취급되었을 일이다. 

여러 장골들이 한데 힘을 모아야 움직일 수 있는 육중한 무덤 바위도 거침 없이 통과해서 무덤 밖으로 나오셨고 안으로 닫아 잠가 놓은 문을 그대로 통과해 방 안으로 들어오셨고(문을 여실 필요도 없이) 갑자기 나타나셨다가 또 갑자기 사라지셨고 구름을 타고 공중으로 올라 사라지시고 하나님 옥좌 우편에 않으신 것이다. 이런 것이 초자연계 몸 즉 범죄 이전에 아담이 누렸던 초능력이다. 이런 최조의 생명력을 아담은 상실함으로써 오늘의 이 비극을 낳은 것이다. 이런 초능력으로 초자연계 존재들(악령)은 인간과 함께 살아왔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의좋게 사는 것이 아니다. 종으로 마구잡이로 부리고 인질로 삼아 가두어 놓고 있는 형세다. 그런데도 인생들은 이 사실을 까맣게 모른다. 지금도 모른다. 바로 이것이 비극이건만 인생들은 모르니까 희희덕거리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이 세상의 현실이다. 그럼에도 성경대로는 믿지 않으니까 이런 정보가 먹혀 들 리가 없다. 인간들만이 모여 사는 줄로만 착각한다. 그리고 만물의 영장이랍시고 최고 존재인 양 으스대며 살아 온 것이나 이제는 더 이상 현실을 외면할 때가 아니다. UFO를 믿는 이들은 아직도 외계에서부터 지구를 찾아 온 손님인 양 단단히 속고 있으니 기가 찰 수밖에 없지 않은가. 많이 배운 것 자랑하고 남보다 비교적 많이 안다고 뽐내는 한심하고 천박한 소위 배운 자들 지식인생들이고 생색을 내기에만 바쁘지만 그들 역시 속아 넘어가는 데에는 남에게 뒤질세라 앞을 다투는 꼴들이다.

소위 "외계인"을 믿고 있는 것이다. UFO야 현실이니까 현실을 부정해서는 안된다. 외계인으로 속이고 있는 그 노림수에 맥없이 넘어간다는 현실이 문제다. 성경을 배척하여 성경에 대해 무지하니까 당연한 결과다. 달리 결론이 날 수가 없다. 오직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그 단 한 가지 이유만으로 이런 사실을 인정하려 들지를 않는다. 보이지 않는다고 하나님도 부정하고 영혼도 부정하는 소위 과학자 그리고 그런 과학자의 해석을 맹신하는 소위 지성인들. 우리가 3위1체의 원리에 의해 초자연계를 강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현실을 알라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외침처럼 "네 자신을 제발 알라"는 것이다.

나 자신도 모르고 적(원수)도 모르니 백전백패다. 필승이 아닌 필패다. 악령만 있는 것이 아니다. 악령들이 인생들과 교합(일종의 야합이다)하여 낳은 네피림이라는 족속이 만들어져 있어 이들의 죽은 혼백들이 무수히 이 지상 위에 나돌아 다닌다. 아담 시대 때로부터 지금까지의 숫자이니 실로 어마어마한 양이다. 네피림이 네피림을 낳고 그렇게 해서 씨를 퍼뜨린 그 숫자만 해도 엄청나다. 이들은 육체만 없다뿐이지 악령의 속성과 역할 그대로다. 필자가 NSO(Nephilim Soul Orb, 네피림이 죽은 망령의 좁쌀 또는 팥알 만한 크기의 공 모양의 형체ㅡ반드시 공 모양도 아니고 기기괴괴한 형태를 갖추고 있음이 확인되었다)를 공개하고자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손상되었다고 여겼던 자료가 이젠 대부분 다 복구되었으나, 충분히 모든 것을 설명한 연후에 세상에 알리고자 하여 지금까지 발표가 지체되고 있다. 네피림의 그런 망령들(球體)만 촬영한 것이 아니라 악령의 신체 일부까지 극소 부분이기는 하나 촬영된 것이다. 손가락, 손목 부분 등이다.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과의 차이, 간단히 말해 이것이 자연계와 초자연계와의 차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것,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 속단함은 너무나 천박한 처사다. 옛 시절 중국에서 한 관리에게 뇌물을 갖다 바치며 "아무도 모르니 받아주십시오" 하는 자에게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네가 알고 내가 안다. 어찌하여 아무도 모른다고 하느냐"고 일갈했다지만, 이제 오늘날에 와서는 "하늘도 알고 땅도 알고, 나도 알고 너도 알고, NSO도 알고 악령도 알고 천사도 아는데 하나님도 아는데 어찌 아무도 모른다고 하느냐" 해야 할 때다. "귀신처럼 안다"라는 말도 있듯이 이 NSO가 바로 귀신의 실체(본체)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악령들에게 모든 것이 장악되어 있고 그 놀음놀이에 휘말리고 꺼둘려 이들을 따를 수밖에 없는 인간 생활을 청산, 과감히 고별을 고하고 오로지 옛 터전의 뿌리를 찾아 우리 역시 초능력의 초자연계 존재로 회귀하는 것만이 유일한 관심사가 되어야 마땅하지 않은가ㅡ이것이 세상에 대하여 우리 그리스도의 사람들이 외쳐야 하는 유일한 주제인 것이다. 이보다 더 중요하고 긴박한 것이 있을 수 없다. 몰라서 태무심이요 태평이다. 알면 밤을 새워서라도 이 문제부터 해결하려고 덤빌 것이요 울고 불고 발버둥칠 것이다. 그러나 철저히 눈을 가려놓았으니 도리가 없다. 이 때는 모르는 것이 약(藥)이 아니라 병(病)이다. 

그리고 자기가 이 사지(死地)로부터 구제되었으면 다른 사람들을 당연히 이 참담한 불행으로부터 건지기 위해 노심초사해도 시간이 모자랄 지경이다. 어느 여가에 이 세상 산다고 헛되이 허송세월하리요. 최소한으로 먹고 최소한으로 입고 그리고는 이 일에만 줄기차게 매달려야 하는 것이 양심의 명령이자 하나님의 분부이기 때문에 입을 것과 먹을 것이 있은즉 족하고 돈을 좋아하지 말고 현재 가진 것으로 만족하라고 성경은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딤전 6:8/히 13:5). 따라서 성경은 절대로 잘 먹고 잘 살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이단 사이비 치고 자아중심이 아닌 자가 없고 호의호식 진탕으로 사는 데에 관심 없는 자가 없다.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이런 데에 관심이 있는 자로서 제대로 올바른 소리를 하는 자치고 하나님의 구원의 희소식인 복음에 대해 확실히 아는 자 드물다. 이 세상에서 잘 살아도 된다는 그런 생활자세 자체가 비진리임을 스스로 드러내고 있지 않는가.

성경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과의 차이를 분명히 하고 있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가벼운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무거운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으로서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앎이니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여 이렇게 입으려 함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다.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 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영원해야 제대로 된 생명이다)에게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다.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다. 이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에 거할 때에는 주님과 따로 거하는 줄을 아는 것이니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다.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님과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니 우리가 주님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사람을 권한다"(고후 4:17-5:11) 하였다.

따라서 우리의 싸움(악령들과의 전쟁)도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음이니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이 모두 인간이 아니라 악령들을 가리킴)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다.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흉배(가슴 방패로 옷입은 것)를 붙이고 평안의 복음(전달, 전파하는)으로써 마련된 군화(軍靴)를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손으로 쥐고 자유자재로 작동시키는)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불 화살)을 소멸시키며 구원(구원에 대한 확신과 이제도 여전히 작동되는 하나님의 구원, 구출의 초능력)의 투구와 성령의 검(劍)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無時, 시와 때를 가리지 않고)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시어 나로 입을 벌려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여주십시오 할 것이니 이 일을 위하여 내가 쇠사슬에 매이기까지 한 사신(使臣ㅡ말씀 전파의)이 된 것은 나로 이 일에 당연히 할 말을 담대히 하도록 하려 하심이다"(엡 6:11).













2016년 7월 1일 금요일

21세기에서부터 시작되는 르네상스 (수정 보완)








주님의 날

첫 사람 아담은 자신의 범죄로 인해 한번도 인간 세상을 다스려본 적이 없었다. 사탄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따름으로써 사탄의 추종자가 되어, 사탄이 아담 위에 올라 섬으로 인해 인간 세계의 지배자(임금) 그래서 이 세상 신(神)이 된 것이다. 고로 범죄 전의 아담의 자리에 위치해 계시는 마지막 아담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아담의 그 역할을 당연히 맡아 하시게 되어 있다. 그래서 일정 기간(계시록은 이를 "천년"이라 규정하고 있는데) 이 인간 세계를 다스리게 되신다. 천국에 들어가는 이들마다 원칙적으로 일정량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고후 1:5/빌 3:10/벧전 4:13) 것이 사실이나(장시간 기도에 임하여 성령 안에서 해산의 수고를 하는 것 역시 이와 같은 고난의 일종) 그 중에 특별히 "그리스도의 남으신 고난을 그 몸된 교회를 위해 자기 몸에 채운"(골 1:24) 이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그 때 다스리는 자가 된다. 그런 영광의 자리를 탐하여 고난 받으려는 이들도 없겠지만 만약 있다 하더라도 그런 자아중심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시지 않는다. 그런 것에는 관계 없이 오직 사랑으로써 하나님과 사람을 섬길 일이다. 상벌(賞罰)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 우리의 소관사도 관심사도 아니다. 

고로 적 그리스도의 등장은 그러한 마지막 아담의 정의로운 통치 시대를 위한 '악인들의 일대 청소 작업'(살후 2:12)이라 할까. 적 그리스도를 경배하는 자마다 "불의를 좋아하는 자"(:12)들로 분류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주님의 날"에 베드로는 말하기를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올 것이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날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질 것이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한가.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할 것이다.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는 것이다"(벧후 3:10-13) 했으니 이 경우 주의 날은 "천년" 통치 기간이 종료되고 마지막 심판을 말함이 분명한데, 그러나 "도적같이 올 것"이라 했으니 예기치 않게 갑자기 벌어지는 일이란 뜻이다. 

이런 "도적같이 임한다" 한 것은 바울 사도도, "주님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실 것이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님을 영접하게 하실 것이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님과 함께 있을 것이다....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주님의 날이 밤에 도적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앎이다. 저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잉태된 여자에게 해산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홀연히 저들에게 이를 것이므로 결단코 피하지 못할 것이다....너희는 어두움에 있지 아니하므로 그 날이 도적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할 것이니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두움에 속하지 아니하다"(살전 4:16-5:4) 하였다. 

위의 바울의 언급에서 우리 살아남은 자도 공중으로 들어 올림을 받는다고 했으므로 이는 마지막 심판이 아니라 마지막 아담의 천년 통치 시작을 의미하는 경우다(살후 2:2-12). 그러나 똑같이 "주님의 날"이다. 이제까지의 모든 "오래 참으심"을 끝내고 오로지 하나님의 전권을 휘두르시는 때임을 말한다. "그 날"로도 표현되고 있는데 주님께서도 이와 같이 표현하셨다. 그런데 복음서에 보면 예루살렘의 마지막 날과 이 세상의 마지막 날에 대해 명확히 구분하지 못하고 기술한 듯한 인상을 남기고 있는데 바로 이와 같은 점을 "주님의 날"에서도 보는 것이 아닌가 여겨지기도 하는 대목이다. '구원과 관련된 것'을 제하고는 우리가 모든 것을 정확히 해석하고 있다고 자부할 필요는 없다. 베드로가 말한 대로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다"(벧후 3:16)고 인정하면 되고 따라서 이것을 억지로 풀려고 할 것은 없는 것이다. 단지 그 요점을 파악하면 되는 것이니 즉 "항상 기도하여 깨어 있는"(눅 21:34-36) 데에 있다. 

첫 사람 아담으로 말미암아 마멸된 "만유를 회복하시는"(행 3:21) 단계에 있으시므로 마지막 아담께서 비록 첫 사람 아담의 위치에 계시나 아담이 범죄하지 않았다면 전개되었을 상황과 모든 것이 같을 수는 없다. 아담이 자연계 육체로 아주 전락하지만 않았다면 영물들처럼 초자연계 몸으로 있으면서 악인과 의인(영물들이 "거룩한 천사"와 악령들로 구분되었듯이)으로 모든 인생들이 분류되었을 것이나 이미 자연계 몸으로 환원되어버린 다음에 인류 역사가 시작되었으므로 양상이 약간 다를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리게 되는 초자연계 몸으로 된 이들이 있는가 하면 그 다스림을 받는 지상의 인생(자연계 몸의)들로 나누어지게 되며, 그러나 지상의 인생들도 노아 당시의 아담 시대의 사람들처럼 모두 천년 정도는 장수하게 된다. 그 이상 자세한 것은 우리의 호기심만 충족할 뿐이므로 현재로서는 무의미하다.  

그리고 주님이 불시에 오실 것이므로 조심하여 깨어 있으라 하셨는데 즉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할 것이다.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할 것이다.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눅 21:34-36) 하신 말씀에서, "이 날"이 적 그리스도가 한창 지구상의 모든 인간을 장악하고 있을 때인가 아니면 그러기 전인가 하는 것인데 후자에 해당된다고 하겠다. 적 그리스도가 오는 것과 마지막 아담께서 오시는 것을 같은 '때'로서 볼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무슨 말이냐 하면 적 그리스도가 임하여 올 때는 이미 모든 것이 거의 판정이 난 때여서 깨어 있는 자는 그 원수를 이길 것이지만(대개 이 경우 죽임을 당하는 것이 그를 이김인 것)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그에게 복속(服屬)될 것이기에 그렇다. 따라서 모든 사람에게 직접 관련되는 것은 적 그리스도가 아니라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의 관련 여부가 핵심이다. 고로 적 그리스도를 이기면 마지막 아담 안에 있는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그리스도 밖에 있어 멸망하는 자로 간주되는 운명이다. 

그런즉 적 그리스도가 무대에 출현하게 되면 그것은 마지막 아담께서 곧 세상에 강림하신다는 사실을 전제하는 것이므로 적 그리스도의 출현과 그리스도의 재림(강림)을 동일시하게 되는 의미다. 때문에 주님께서는 적 그리스도를 언급하시지 않고 다만 "인자(人子)가 나타나는 날"로만 나타내신 것이다. 주님께서 적 그리스도에 대해 성경상으로 언급하신 것은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너희가 영접할 것이다"(요 5:43) 하신 이 한 말씀 정도뿐이다. 자아중심의 속성은 그런 똑같은 자아중심의 속성끼리 통하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