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6월 30일 목요일

일할 준비, 싸울 준비, 죽을 준비


"내가 올 때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눅 18:8) 하신 말씀과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않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하더라"(계 13:15)는 대목에서 보듯이 소위 "휴거"라는 것은 인위적인 교리이고 하나님의 말씀은 아닙니다. "휴거"가 사실이라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교회 전체가 하늘로 들려져 올라간다는 뜻일 수밖에 없는데, 다시 말해 구원 받게 되어 있는 자는 더 이상 지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 되는데 반해,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않는 자는 모두 죽임을 당한다"고 했으므로 아직 교회가 남아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고는 스스로의 힘으로 적 그리스도에게 넘어가지 않을 자란 없는 까닭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거니와 주님의 강림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살전 4:15)라 했으므로 "우리 살아남은 자들"은 교회를 말하고 따라서 "휴거"(적 그리스도 때의 환난을 받지 않고 에녹이나 엘리야 같이 산 채로 즉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들려 올라간다는)의 교리는 인간이 꿰어 놓은 망상일 뿐입니다. "인자가 올 때 믿음을 보겠느냐" 하신 말씀도 믿어 구원 얻는 자가 아직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나타내시고 그런 상황에서는 교회가 아직도 얼마든지 건재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핍박을 받는 것은 사실이지만 극소수의 남은 자가 (절대 다수가 적 그리스도에 의해 죽음을 당함으로써)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맥없이 그저 죽기만 하는 것이냐. 아닙니다. 전투 중에 죽는 것이니, 전사(戰死)는 영예입니다. 기도와 말씀 전달과 "사랑 가운데 끝까지 견디는"(마 24:12,13) 속에서 세상에서의 빛과 소금 역할을 다하는 것이 영예롭게 죽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도 처참한 죽음을 준비해야 합니다. 이것을 단순히 "약함"이라고 할 것이 아니라 "약함 가운데에서의 강함"(고후 12:10)이라는 인식 전환이 필요합니다.


성령과 함께 일하는(벧전 1:12) 막강한 자로서 최후 일각까지 우리의 본분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렇게 적 그리스도에 의해 죽을 때에는(계 13:15) 반드시 죽게 될 것이니 고삐를 늦추지 않고 하나님의 사업에 총 매진해야 하는 것이며, 이 세상 삶(근심 걱정, 재리의 유혹, 기타 세상 쾌락-막 4:19)에 붙잡혀 조금이라도 한눈파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눅 9:62). 열매 맺지 못하는 나무는 베어버림을 당합니다(눅 13:7).


일단 나무를 심는다는 것은 회개하여 죄 용서하심을 받고 성령을 받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그 후의 상황이 처음과 같지 않다는 것이 바로 열매 맺지 못함의 상황입니다. 믿음을 버린 것은 아닌데 열매가 없습니다. 세상 염려, 돈의 유혹(잘 살겠다는 욕심), 일시적이라도 또 비록 건전하다 하더라도 쾌락에 젖어 있는 모든 것이 바로 이 열매 맺지 못함의 온상(溫床)이 됩니다(마 13:18). 휴거의 교리는 왜 그렇게 "휴거"가 되어야 하느냐 그 정당한 이유를 찾지 못합니다.


단지 하나님의 교회를 보호한다는 차원이라면 그럼 적 그리스도의 손에 무참하게 죽는 이들은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은 아무도 차별하시지 않습니다. 이유가 있을 수 없고 오직 자아중심에서 우러나는 비겁한 도피 행각에 지나지 않습니다. 바울이 말한 바 "공중에서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때는 이미 적 그리스도가 패망하고 천년 통치 기간이 시작되는 때입니다. 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가 있고 못하는 자기 있어 전자만이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나타나실 때 공중으로 들려가게 되고 그리스도와 함께 천년간 세상을 다스리게 됩니다. 이것이 성경적 "휴거"라면 "휴거"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이 그렇다는 것이고, 우리는 이에 집착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하실 일이지 우리는 오직 주님께 대한 사랑뿐입니다.


"우리가 종일 주님을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습니다"(롬 8:35-39) 함과 같이 우리는 백 가지 면으로 생각해도 이 세상에서는 고난을 받게 되어 있음이 명백합니다. 왜냐, 구원 받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므로, 하나님의 아들들과 겨루어 이길 용사가 없고 장사가 없습니다. 일방적인 싸움으로 싱겁게 끝날 일입니다. 그래서 일부러 약한 자가 되어 그 위치에서 이기는 방법이 가장 이상적인 공정 공평한 싸움이 됩니다.


앞에서 말한 "약한 자로서의 강한 자"라는 것은 세상에서 비록 만신창이, 천덕꾸러기가 되어도 자기 지조와 신념을 버리지 않는 데에 있습니다. 즉 "인내로써 하나님의 뜻을 행한다"(히 10:36/12:1/롬 15:4)는 것은 인내로서 싸움에 이긴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너희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아니할 것이다.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을 것이다"(눅 21:17-19) 하신 그대로입니다. 인내와 안위(comfort)의 하나님이십니다(롬 15:5).


싸우는 두 진영의 깃발과 그 색깔이 분명하게 갈라져 있습니다. 하나는 자아중심이요 다른 하나는 자기 부인입니다. 또 전자는 힘(권력이든 금력이든 학력이든 인력이든)으로 밀어붙이는 것으로 특징을 삼고 후자는 약하고 고난 받는 것으로서 그 색채가 뚜렷합니다. 혼동될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 함과 같이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됩니다. 적을 안다는 것은 적의 전술 전략을 꿰뚫는다는 것이니 사탄의 전략은 어찌 하든지 나로 하여금 자아중심에 빠지게 하는 데에 있습니다.


주님의 광야 시험에서, 그저 배가 고프다는 이유로 돌로써 떡을 만들어 먹으려 하고 이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고려의 대상이 안된다는 식으로 나가도록 만드는 것이 사탄의 시험의 첫째입니다. 무조건 이유 여하를 불문하고 갑은 을을 위해서만 살고 을은 갑을 위해서만 살아야 합니다. 여기서 벗어나는 것은 100% 멸망입니다. 의심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런 확신을 우리는 3위1체의 원리를 따라 공고히 해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써 그 뜻을 행함으로써 사는 것이지(이것이 을이 갑을 위함인 것) 내가 나를 위해 하는 그 어떤 것도 용납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이치를 "너희는 먼저 그 나라와 그 의(義, 올바름, 진리)를 추구하라"는 말씀으로 가르치신 것입니다. 우리가 이전에는 긴가민가 식으로 확신이 서지 않았다면 지금은 만유의 법칙(3위1체의 원리) 차원에서 이해함으로써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없다는 확신을 가질 때입니다. 개미가 한 번 입에 물면 그 몸이 두 동강이 나도 절대로 놓지 않고 그냥 물고 있듯이 그런 자세와 결의, 사랑이 필요합니다. 이런 일에서는 얼마든지 맹목적이라는 소리를 들어도 됩니다. 오히려 영광이 됩니다.

바울이 선언한 것처럼 우리가 약할 때 강한 것이요 지는 듯해도 이기는 것이므로 이기는 자로서 우리 입술에서는 찬송이 흘러 넘치고(엡 5:19/히 13:15) 승리자로서의 환희가 넘쳐납니다. 진정 이기고 들어가는 것이냐 여부는 우리의 자세에 달려 있습니다. 따라서 "두렵고 떨라"(빌 2:12) 한 것은 지당합니다. 그러나 마지막 아담을 모시고 있기에 "항상 이김을 주시는"(고전 15:57)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이 넘치고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는 것입니다.  

같은 편지에서 "두렵고 떨라" 하고 "항상 기뻐하라"(빌 4:4)는 것이니 이 의미가 큽니다. 결단코 어느 한 쪽으로든 치우치면 안된다는 경고입니다. 일사부재리와 원리원칙에 철저하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그리고 성령의 위로라는(행 9:31) 양면성과 동시성으로 초대교회는 진행되어 모든 시대의 각 교회에 본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는 것이다. 내가 확신하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을 것이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굶주림이나 헐벗음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2016년 6월 29일 수요일




사람들은 대개 대소변 보는 것을 예로부터 더럽다, 창피하다고 하며 부끄러워합니다. 지금은 스승을 알기를 무엇 같이 여기지만 과거에는 사도(師道)를 중시하여 사람되라고 가르쳤기에 초등학교 학생들이 선생님을 우러러 보았으므로 선생님은 대소변도 보지 않는다고 생각한 아이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아이들도 본성적으로 그렇게 알고 있는 것입니다. 남녀가 성적으로 관계하는 것도 한 편으로는 짐승 같다고 여기기에 예로부터 그런 일을 방사(房事)라고 했습니다. 다 하는 일이지만 그래도 은밀히 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 편에서 보면 이것은 모순이 됩니다. 창조하실 때 왜 이렇게 부끄러워하도록 만드셨느냐 이 뜻입니다. 짐승들은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방귀를 뀌는 것마저 그 소리가 나오는 배설구를 연상하는 것이기에 사람들은 가능하면 그 소리 내는 것을 참는 정도입니다. 이승만 전대통령이 참을 수 없어 방귀를 뀌니 옆에 있던 한 사람이 방귀 뀐 임자의 무안함을 덜어주기 위해 "각하, 시워하시겠습니다" 한 것을 두고 아첨의 본보기라 해서 널리 회자되었지만 이 또한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인간의 편협한 시각입니다. 아첨이라기보다 염치없이 나와버린 현장에서의 어색한 분위기를 수습하고 어른의 당혹스러운 감정을 역지사지로 어는 정도 완화시켜 준 재치 있는 응수라고 긍정적으로 보아주는 여유가 필요합니다. 

천사들(靈物)은 대소변을 보지 않습니다. 필요한 에너지를 얻기 위해 먹기보다는 순수한 식도락을 위해서일지도 모릅니다. 육체가 완전히 투명해지기도 하는 판에 먹고 마신 찌꺼기가 배설되느라 걸리는 시간도 필요 없을 것입니다. 그들은 짝짓는 일도 없습니다. 아담 역시 초자연계 몸으로 있어 짝 짓기 위해 남녀로 분할된 것이 아니라, 단지 상대할 짝을 이루기 위해 대칭성 원리에서 하나님께서 아버지와 아들로 계시는 것처럼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서 하나님의 모습을 따름이어서 "홀로 지내는 것(獨處)이 좋지 않다" 하셨습니다. 
여자가 없었다면 아담(여자도 남자도 아닌 남녀 본질을 하나로 조화시켜 있으므로)이 초능력으로 자식 생산을 했을 것이나 여자가 있음으로 해서 여자가 그 역할을 했을 것이요 (자연계의) 동물적인 교접은 없는 것입니다. 왜냐면 초자연계 몸으로서의 광채가 벗겨져 나간 자연계 몸의 벌거숭이가 되어 있음을 "부끄러워"했기 때문입니다. 

자연계 몸이 되면서 자연계 동물과 같은 방식으로 자식을 생산하게 된 것입니다. 남녀간의 애정 교환은 초능력의 초자연계 몸이기 때문에  자연계 육체처럼 굳이 육체적으로 접속을 해야 느끼는 것이 아니라 서로 보기만 해도 그 눈빛만으로도 육체적인 교접이 가히 미치지 못할 최상의 희열을 느낄 수 있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 자연계에 속한 동물 같은 모양에다 동물 같은 행동을 하게 된 것을 이제 자연계에 속한 인간으로서 부끄러워하게 되는 연유입니다. 고로 하나님은 이렇게 인간을 만드시지 않았고 인간이 범죄하여 이런 부끄러움을 스스로 불러들였으니 슬픈 현실입니다. 

자연계 몸이 되면서 "대소변", "남녀 잠자리" 등이 수반된 것입니다. 이런 비극적 실상은 모르고 인간도 동물과 무엇이 다르냐 하고 심지어 벌거벗고 지내는 나체족이 되는 것도 불사하니 악령 사탄, 이 세상 신에게 완전히 휘둘려서 그런 볼썽 사나운 짓도 하게 됩니다. "인간이 일반 동물과 무엇이 다르냐" 하고 이를 '의식하는' 것 자체가 한 때 인간이 초자연계 몸이었다는 사실을 방증함이 됩니다. 그렇게 '인간'과 '동물'을 구별하여 말할 줄 안다는 그것입니다. 인간이 애당초 초자연계 몸이었다는 사실을 강조하여 이런 사실도 지적합니다. 사탄은 이런 비극적 결말을 침소봉대하여 오늘날 온갖 음풍(淫風)을 온 세계에 확산시키고 있습니다. 한낱 고깃덩이인 동물에 불과한 존재로서 인간을 부각시켜 영혼을 고사(枯死)시키려는 획책입니다. 

세상이 이러고도 잘도 굴러간다고 착각할 일이 아닙니다. 억지로 추스려 간다고 보아야 옳습니다. 그 강제력의 하나가 3운법칙입니다. 이렇게 무리하게 억지로 끌고가는 것이므로 임시변통인 것이며 목적이 있기 때문이고 이 목적이 끝나면 끝나기가 무섭게 이 세상은 막을 내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 목적이 다름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복음)이 온 세상 에 전파되는"(마 24:14) 일입니다. 지금은 그 전파의 정리 기간으로서, 잘못 전파된 것은 바로잡아 주는 일을 겸해서 전파된 구원의 말씀을 듣고도 여전히 고집스럽게 "불의를 좋아하는 이들"(살후 2:12)을 적 그리스도를 통해 도태시키는 때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한 사람의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서 족했지만 지금은 구원을 얻었다고 자처하는 사람마다 개개인 모두가 다 세례 요한의 몫을 해야 하는 때입니다. 

2016년 6월 28일 화요일

사람되신 하나님(하나님이신 사람)과 하나되었으니 원도 한도 없어라ㅡ이 세상 죽음과 고난이여 얼마든지 오라, 오라, 오라



나는 7전(顚)8기(起)하리라(잠 24:16)




그러므로 하나님을 더 이상 막연하고 애매 모호한 존재로 착각해서는 안됩니다. 나와 똑같은 사람처럼 처음부터 계셨기 때문에 성경은 아브라함을 하나님과 "친구" 사이라 한 것입니다(약 2:23). 그 증거가 아들 친히 나와 같은 사람이 되시어 죽음의 고난 받으신 사실입니다. 오직 "하나님"이시란 사실은, 나와만 아니라 모든 인간 그 어느 누구와도 나와 같은 이런 '일대일'의 관계로 상관하신다는 데에 있습니다. 이 차이입니다. 그래서 세상에 오신 아들께서는 "다시는 너희를 종(창조주에 대한 피조물)이라 하지 않고 친구를 삼는다" 선언하신 것입니다. "친구"라는 것은 같은 또래가 아니고는 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그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하셨습니다. 그런즉 우리의 머리가 되시는 마지막 아담보다 내게 더 가까운 존재가 없습니다. 이 사실을 일관되게 성경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 어느 인간보다 나와 가까우시고 그 어느 인간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 이ㅡ나의 부모의 사랑은 태산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다 하는데 부모 사랑은 이 하나님 사랑의 그림자입니다.

그리고 사랑은 함께 함이므로, 갑과 을의 둘이 아나됨이므로 이를 가리켜 갑은 을 안에 있고 을은 갑 안에 있다고 설명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은 영으로 즉 성령으로 내 영혼처럼 계시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바로 이런 사랑의 용어입니다. 즉 갑의 삶은 을이요 을의 삶은 갑이 되어 있음을 말합니다. 그래서 "내가 사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빌 1:21), "다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는 것"(갈 2:20)이라 했고 이제 무릇 산 자는 모름지기 나 위하여 죽으시고 나 위하여 다시 살아나신 분을 위해(그렇게 본을 보여주신) 사는 것이고 결단코 나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고후 5:15) 한 것입니다. 이 세상은 이런 삶이 아니므로 즉 자아중심은 자기 부인의 반대 개념이므로 자아중심으로 사는 것이 이 세상에서 삶의 낙으로 통하는 것이라면 자기 부인의 정상적인 삶은 죽음의 고난으로 통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 말해 이 세상의 자아중심의 삶은 '죽음'으로서 정상이 아닌 비정상이란 뜻입니다.


때문에 이 세상에서 부유하여 부자로 사는 자는 오는 영원 세상에서는 위로가 없다 즉 죽지 못해 사는 고난 고통 비애뿐이라 천명하셨고, 속지 말고 부자로 있으면 그 부(富)를 반드시 가난한 자 구제하는데 남김없이 바치라고 바울사도는 가르치고 있습니다(딤전 6:17-19). 3위1체의 원리를 따라 반드시 그렇게 해야 "장래에 자기를 위해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19)이 됩니다. 하나님의 축복 받아 잘 산다는 것은 사람을 멸망으로 인도하는 사탄의 교리입니다.


우리의 생명이신 마지막 아담께서 이 세상에 나타나셔야 그제서야 우리도 생명으로 변환되는 것이니(골 3:3) 그 때까지는 필연적으로 죽음의 고통뿐입니다. 생명과 죽음의 그 중간은 없고 반드시 둘 중 하나입니다. 이것이 3위1체 원리의 대칭성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류의 구원자)께서 다시 오시면 반드시 초자연계 몸으로 즉 첫 사람 아담이 범죄 전에 누렸던 그 애초의 초자연계 육체의 영광으로 오십니다. 적 그리스도는 그런 몸으로 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것으로써 진짜와 가짜(그리스도에 관한)를 구분하라고 미리 경고하셨습니다. 가짜는 반드시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 대신 성경에 기록된 모든 기적보다 월등한 기적을 나타내어 속이게 되어 있습니다. 이 차이를 분명히 명심할 일입니다. 


이제부터의 그리스도는 반드시 번개처럼 동에서 번쩍하면 서에서도 번쩍하는(눅 17:24) 초자연계 몸의 모습 즉 천사와 같은 모습으로 오신다는 것이니 왜나면 이것이 인간 본연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서 속죄(贖罪) 작업을 마무리하셨기 때문에(이미 2천년 전에) 더 이상 범죄자 죄인의 구차한 비정상적인 모습인 이런 자연계 몸이 되어 있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마지막 심판 후에는 영원 멸망에 들어가는 악인이나 영생에 들어가는 의인이나 똑같이 "부활하여"(행 24:15) 초자연계 존재가 됩니다. 왜냐면 이것이 인간의 애초의 정상적인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런즉 여전히 이런 자연계 육체로 나타나 아무리 큰 소리 치고 초능력을 과시해도 비정상이고 죽음의 자연계 몸인즉 가짜일 수밖에 없음을 스스로 노정시킴으로써 자연적으로 폭로가 됨을 알아야 합니다. 이 점이 적 그리스도임을 간파하는 가장 강력한 척도(尺度)이니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기적 따위에는 일절 아랑곳하지 마십시오. 죽음의 자연계 몸으로서의 그리스도의 모습은 오직 한 분, 한 번뿐입니다. 이미 2,000년 전에 이루어졌으니까.














2016년 6월 26일 일요일

21세기에 대처하는 정확한 정보ㅡ세상 살고자 하는 망상을 끊어야 하는 이유 15가지



정보가 정확해야 싸움에서 이길 수 있습니다. 나폴레옹이 부하들에게 외친 것은 "정확한 정보를 달라, 정확한 정보!"이었습니다. 전쟁만 아니라 모든 사업에서 첫째로 정보가 정확해야 합니다.

아담이 거룩한 천사들처럼 영생하도록 창조되어 초능력을 구사하는 초자연계 존재였는데 사탄의 꾐에 넘어가 범죄함으로써 현재와 같은 이런 자연계 육체로 환원되어버렸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오늘날 적그리스도 및 그의 등장을 위한 정지(整地) 작업으로 youtube 등을 통해 요란스럽게 전주곡(前奏曲)을 울려대고 있는 각종 초능력 현상(소위 "ufo"를 위시해서)에 대한 명확한 설명이 되며, 또한 이에 완벽하게 대비하는 대책이 됩니다. 성경을 이와 같이 바르게 아는 것이 오늘날 아주 중요합니다. "정확한 정보" 차원에서 인식되어야 합니다.

처음부터 인류 역사가  불행의 비극적 사건으로부터 시작한 것을 아는 것이 오늘의 각종 현상을 푸는 열쇠입니다. 인간이 애당초 이런 자연계 육체로 존재하기 시작했다 또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인간을 창조하셨다고 "믿는" 것은 그 당시 에덴낙원에서 아담 부부를 속이던 똑같은 거짓말, 속임수에  대한 굴복이 됩니다. 초자연계인 에덴낙원에서 시작된 범죄로 인한 저주와 죽음으로 이 세상이 열려진 것이니 그 증거가 사람이 태어나자마자 가장 먼저 살인극, 타생명 파괴 행위의 무고한 피로 물들여지는 인간사(人間史)의 서막 제1막 제1장입니다.

그 내용도 의인이 악인을 징계하는 의미가 아니라 도리어 악인이 의인을 이유 없이 오직 자기 눈에 거슬린다고 참살하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로서 벌어진 것이요 오늘날까지 이는 변함없는 현실 그대로입니다. 성경에도 악인이 이 세상에서는 흥왕하고 창성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오직 그리스도께서 오시기까지 하나님의 가르치을 미리 받는 사전(事前) 대비 차원에서 세우심을 입
은 이스라엘 민족만큼은 정의가 강 같이 흐르는 사회를 꿈꿀 수 있는 것이었으나 이 역시 끊임없이 저질러지는 인간 범죄에 의해 무색해지기가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선민(選民) 이스라엘도 이러했으니 나머지 각 나라 각 족속이야 말할 것도 없습니다.

악이 지배하는 인간 사회, 이것은 인류 역사가 비정상적으로 범죄와 그에 대한 저주로 얼룩져 내려오기 시작한 대로 이런 비극을 조장한 악령 사탄이 이 세상의 임금(왕, 지배자)이 되어 있다는(고후 4:4/요 14:29) 그 증거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 보실 때에는 죄인 인간이 자기 죄로 받는 형벌이요 저주라는 차원에서 인식되어야 하므로 각종 악으로 야기되는 인간 비극을 걷어내실 수도 실상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렇다고 악이 무작정 방치될 일도 아닙니다. 고로 이런 경우 인간고(人間苦)는 고통 그대로 두면서 또 악인의 폭압을 어느 선까지(이를 규제 규정하는 것 중의 하나가 3운법칙) 허용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의가 힘찬 맥박으로 살아 숨 쉬게 하는 것이 다름아닌 '의인의 고난'입니다.

"의인의 고난"은, 악인은 그 자행되는 악한 행위를 따라 그대로 걸러 내어져 심판에 처해지게 하고 의인은 골라 내어 그 희구하고 염원하는 대로 영생과 영원한 복락으로 포상되도록 함에(롬 2:7-10) 주목적이 있어 그야말로 사필귀정을 뜻합니다. 따라서 악인은 악인대로 악을 행하고(세상이 보기에는 "하늘도 무심하시지" 하는 탄식을 자아낼 정도로), 의인은 의인대로 선한 목적을 위해 고난을 받는(세상이 보기에는 억울하고 부당한 처사를 당하는 것으로 비쳐지나) 일견 부조리로 인식되어지는 세상사 인간사지만 그 합리성과 타당성은 확고한 것입니다. 비정상인 것 같지만 정상이요, 불의가 판치는 것 같으나 정의는 확립되어 있습니다.

성경이 정의하는 대로 이 세상은 악하고 음란(삶의 지조가 없는)하지만 그와 같이 한 치도 빈 틈이 없어 허수하게 돌아가지 않고 엄정, 엄밀하게 운행되고 있다는 증거 중에 하나가 바로 3운법칙입니다. 사탄을 비롯한 악령들이 인간 세상의 지배자가 되어 있지만 실질적인 주인은 인간입니다. 말하자면 주인이 못된 종을 만나 종이 주인 위에 걸터앉아 주인장 노릇을 하고 있는 그런 거꾸로 된 모습을 취하고 있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무질서가 아니라 방금 설명한 대로 전화위복(하나님의 은혜와 지혜로써)의 무대 설정이 되어 차질 없이 전개되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적 그리스도는 이러한 인간 비극(그러나 하나님의 인간 구원의 사업에서는 절대적이고도 핵심이 되는 의미)을 무시하고 들어가거나 인정한다고 해도 아주 과소평가해 버리는 대대적인 속임수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 받으심을 인정하는 겻이 되는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인간 역사는 비극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즉 초자연계 존재로 영생의 행복 가운데에서 살게 되어 있는 인간이 범죄의 대가로 자초한 죽음과 저주로 인해 현재의 인간 불행의 도탄 속에 빠져 구원만을 열망하는 상태에 있음을 반드시 모든 인생들은 알아야 합니다.

이 필수 지식(정보)을 전달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행 1:8)으로서의 마땅한 우리의 임무입니다. 이 유일한 목적을 위해 이 세상에 남아 있는 것입니다. 이제부터의 전도 내용은 바로 여기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며 새 창조와 다시 출생하는 유일한 방법으로서의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려야 합니다. 이 세상의 신들이랍시고 초능력으로 날뛰는 악령들의 발호가 극으로 치닫고 있어 그들의 정체를 설명하여 밝히지 않으면 안되게 되어 있는 오늘의 이 "마지막 때"(단 12:4) 우리 실정이기 때문입니다.

모르니까 암흑이요 이 암흑을 눈치 채지 못하고 밝은 대낮에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고 자부함으로 스스로를 속이고 있으니까 이는 사탄의 손아귀에 장악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행 26:18). 인간은 태어나자마자 숙명적으로 악령 사탄과의 전쟁 상태로 돌입합니다. 몰라서 그렇지 실상이 그러합니다. 고로 마지막 아담과 연합함으로써 사탄을 자기 발 아래 짓밟을 수 있게 되고 이 세상에 대한 승자로서의 입지를 굳건히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 생사를 건 일전(一戰)에서 도리어 악령에게 지고 들어가 그와 함께 영원 불행에 갇히고 만다는 것은 상상만 해도 끔찍하고 소름 끼칠 일입니다. 그런 이들이 절대 다수라고 성경은 경고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경고를 해도 듣지 않으면 옛 아담처럼 죽음의 운명을 스스로 만드는 것뿐입니다. 이런 정확한 정보를 알려주어야 합니다. 이 정보 없이는 필패(必敗)입니다.

성경에 "하나님은 하나이시다"라는 의미를 "한 분"으로 오해하지 않고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라고 하신 그 하나(One)의 의미임을 알아 "3위1체 하나님"의 의미를 바로 깨치고, 이로부터 시작하여 아버지와 아들로서 하나로 계시는 하나님 모습을 따라 만유가 창조되어 자연계와 초자연계로 대립된 만물을 규명해내는 데에까지 진전하게 된 "21세기의 성경 해석"으로 수세기 동안 풀지 못했던 것을 알게 되었다 해서 "21세기 신학"이라 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성경을 "해석한다(풀이한다)"는 것은 베드로 사도도 인정했습니다(벧후 3:16).

3운법칙과 3위1체 원리는 "과학"도 아닙니다. 지금까지 우리 인간이 말하는 "과학"은 자연계에 한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정확하게 표현하면 "자연과학"일 뿐입니다. 3위1체 원리는 초자연계의 실존을 입증하여 자연계는 물론 초자연계까지 망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초과학"이라 하면 더더욱 애매 모호합니다. 왜냐면 3운법칙과 3위1체 원리는 엄연한 법칙인 것입니다. "신학"이라는 카테고리를 정함은, 철학의 한 분류인 것처럼 기만(欺瞞)하여 계시(啓示)가 아닌 학문처럼 여기도록 만든 사탄의 음모에 지나지 않습니다. <한> 분야가 아닌 <전체>, <전부>입니다. 삶 자체입니다. 삶의 필수, 필연입니다. 삶의 기본 바탕입니다.

생존 자체에 관한 것인데도 이에 대한 접근을 차단하기 위해 사탄이 그와 같이 의미를 왜곡시켜 종교 철학 중 하나 즉 불교와 같은 세상 종교 중의 일부로서 격하시킨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과 같은 결과를 낳게 한 것이니 즉 에덴낙원이 초자연계라는 성경의 기본 지식부터도 습득 불가능하게 만들고 자연계의 한 동산처럼 인식하게 한 것으로서, 이에 대해서는 더 이상 설명이 필요치 않습니다. 그러므로 "신학"이라는 개념조차도 우리의 뇌리에서 사라지게 해야 마땅하나 현실이 그렇지 못하다는(사탄이 이 세상 신 곧 지배자로서 세상 문화가 그러한즉) 것뿐입니다.

"자연과학"이라 해서 "초자연과학"이란 것이 또한 자리잡을 수도 없습니다. 초자연계는 자연계에 속한 우리 인간으로서는 한계 밖이기 때문입니다. 인식은 해도 연구 대상이 될 수가 없습니다. 3위1체의 법칙을 따라 그 실존이 증명되었다는 것뿐이지 그 실상을 규명한다는 것은 자연계 존재인 우리로서는 실로 하늘의 별 따기처럼 불가능 그 자체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우리가 자연계에 속한 것이 정상이 아니고 비정상이므로 이 이상(異常)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부터가 제일차적 과제라는 것입니다. 이런 비정상 상태에 있으면서 설혹 초자연계를 구명해본들 그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 지식이 인간을 정상 상태로 회복시켜 영생하게 만드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인류의 유일한 현안 과제는 새로 창조되고 다시 출생하는 것, 이 외에는 일절 있을 수가 없다는 사실에 모든 인류는 눈을 떠야 합니다. 다시 말해 이 세상의 지배신 사탄에게 꼼짝없이 매여 있다는 자기 실상의 비극적 실상에 소스라쳐 깨어 일어나야 합니다. 이 이상으로 다른 아무 것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발등에 떨어진 불부터 꺼 놓고 보아야 합니다. 사탄의 이 세상 지배력은 정작 이 긴박한 실상에 대해서는 눈 뜨지 못하게 하고 엉뚱한 데에다 관심을 집중하도록 휘몰아, 구원 받기 위해서만 사용되어지도록 허락된 천만금 가치의 소중한 시간들을 허송 세월하도록 만들어 스스로 멸망에 빠져들게 하는 흉악한 음모에 있습니다.

고로 우리의 이 세상에서의 유일한 역할은 모든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이런 정확한 정보를 얻게 하는데 있습니다. 성경에 이를 가리켜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로부터 놓여 나와 고아가 어버이의 품으로 돌아가듯 하나님께 돌이키는"(요 14:18/행 26:18) 것이라고 명백히 묘사하셨습니다. 때문에 이러한 우리 구원을 그 옛적 이스라엘 백성이 4백년 간의 이집트 노예 생활에서 해방되어 자유인이 되는 "유월절(逾越節, Passover)"로써 성경은 상징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는 모든 인류 역사의 축소판으로서 하나님의 인류 구원사를 요약해 놓은 것이므로 결단코 유대인만의 국소적(局小的) 사건이 아닙니다. 바로 이 때문에 유대인들이 거의 2천년간의 나라 잃은 서러움을 극복하고 세계의 정상 아닌 정상에 우뚝 서 있어 하나님의 인간 주재(主宰)를 증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계 국가 흥망사에서 기적 중의 기적이 바로 이 유대인들의 행적(行跡)이 되어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지금까지 사탄은 인간이 단지 영생 얻는 데에만 하나님의 뜻이 있는 것처럼 속여 왔습니다. 죽은 자로서의 굴레를 벗어나 천하무적 막강한 권세와 권위(첫 사람 아담이 상실했던 그 고유의 권한)의 마지막 아담과 하나되어 일하고, 싸워 이기는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아버지 일을 대행(代行)함이 구원 얻게 하신 목적임을 뇌리에서 깡그리 말살시켜 왔습니다. 결과론적으로 이렇게 되면 구원이 성립될 수가 없습니다. 구원은 미래의 영역이 아니라 현재의 살아 움직이는(산 자가 되어) 삶 자체를 말함이기에 그렇습니다(고후 5:15). 따라서 올바른 생활("참고 선을 행함"ㅡ롬 2:7-10)을 강조함은 당연합니다. 실제로 구원과는 거리가 먼데:
도 마치 구원 얻은 것인 양 착각하도록 이 세상 신 사탄은 속여 온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하나되어 즉 합하여 한 영이 되는 것은(고전 6:17) 그리스도를 모시고 산다는 것이니 모신다는 것은 주인으로서 받든다는 뜻입니다(갈 2:20). 사랑은 서로 간에 종 노릇함입니다(5:13). 아내 남편을 어떻게 하면 기쁘게 해줄까 하는 것보다 주님을 어떻게 하면 기쁘시게 해 드릴까 하는 것이 앞서야 주인님으로 모시고 있는 증거입니다(고린도전서 7장). 아내 남편을 그와 같이 사랑하는 것은 아내 남편을 항상 생각한다는 뜻이니 사랑은 생각함, 생각해주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항상 그와 같이 주님을 생각하는 것을 "그리스도 의식(意識)"이라 합니다. 이는 3위1체의 원리를 따른 사랑의 법칙이니, 곧 갑은 을을 위해 살고(을의 삶이 되어주고) 을 역시 갑을 상대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생각해주시는 것이 (해변의) 모래보다 많으시다고 한 그대로입니다(시 139:17,18). 이 구절에서 우리말을 비롯해 대개의 번역이 "주님의 생각이 내게 얼마나 보배로우신가"로 되어 있으나 "내게 대한 주님의 생각(나를 생각해 주시는 것)이 얼마나 보배로우신가"가 상식적으로 판단해도 옳은 해석입니다. Biblegateway의 54 번역본 중에 아래 6가지만 그렇게 번역하고 있으나, 이 번역이 맞다는 것은 "그 생각이 모래(알)보다 많다"고 되어 있어 숫자를 강조하고 있어 그렇습니다. 일반적으로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모든 것이라면 그렇게 "많다, 적다"로 특정화되지 않는 법입니다. 히브리어 원문이 그렇게 나와 있어도 그것은 본의 아닌 문장 구성의 잘못이라 보아야 합니다. 원어에만 너무 집착해도 옳지 않습니다. 대개 상식적으로 판단해서 어긋나는 일은 없습니다.

How precious are your thoughts about me, O God. NLT(New Living Translation)

God, your thoughts about me are priceless. NIRV(New International Reader's Version)

How difficult it is for me to fathom your thoughts about me. NET(New English Translation)

How precious it is, Lord, to realize that you are thinking about me constantly! TLB(Living  Bible)

How precious are your thoughts concerning me, O El ! NOG(Names of God Bible)

How precious are your thoughts concerning me, O God! GW(GOD’S WORD Translation)


정작 삶이란 것이 어떤 것인지 사랑이 무엇인지 친히 우리에게 본을 보여 주신 대로 우리는 따라 하게 되어 있는 것이 3위1체 원리에 의한 삶의 철칙입니다. 주(主, 主人)께서 당신 자신을 몽땅 선물로 주셨으니 나도 나 자신을 몽땅 주님께 선물로 바쳐 드림이 "회개"입니다. 그리고 회개한 후의 일체의 모든 삶입니다. "헌신"과 "성결"이 그 다음 단계에 별도로 있는 것처럼 착각하는데 이에 현혹되어서는 안됩니다. 한꺼번에 이루어집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의 속성입니다. 흘리신 피(血)의 값으로 나를 사셨다(행 20:28/계 5:9) 했는데 나를 강제로 사신 것이 아닙니다. 내 동의 없이 사신 것이 아닙니다(몬 1:8,9). 다시 말해 나로서는 내 스스로 자진해서 나 자신을 주님께 바친 것입니다. 3위1체 원리를 따른 동시성과 양면성입니다.

쌍방이 함께 움직이는 것입니다. 머리와 몸의 체제이므로 응당 그러합니다. "네가 나를 부인하면 나도 너를 부인하리라" 하심에서도 명백해지듯 이 동시성으로서의 양면성은 멸망에서도 드러납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자유를 박탈하시고 나를 강제로 파멸로 처넣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내 스스로가 불의를 좋아하여 자아중심이 됨으로써 파멸을 선택한 것인데 이를 집행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측면에서 보면 집행이요 처벌이고, 내 편에서 보면 자유 선택입니다. 이렇게 전혀 다른 성질의 하나로서의 규합이 3위1체 원리에서의 갑(a)과 을(b)의 대칭성에 의한 병(c)의 조화(調和) 즉 "둘의 하나됨"을 이룸입니다.

내가 구원을 받았지만(이는 하나님의 은혜) 내 스스로 구원을 이루어야 하는 것이니(이 "은혜"를 기반으로 하여) 이 "구원"이라는 "둘의 하나됨"은 갑과 을이 동시에 양면성으로 움직여야 유지 존속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일방적인 움직임 즉 짝사랑은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철저히 나를 위하시니 나 역시 하나님을 위해야 한 몸(머리와 몸)으로서의 기능(機能, 技能)이 정상화됩니다. 한 몸으로 기능해야 진정한 의미에서의 행복한 삶이 가능합니다.

이 세상은 머리로서의 하나님을 부정하니 이러한 완전한 실체로서의 삶이 아니라 그림자로서의 단지 찰나적 목숨일 뿐입니다. 사람이 살 수 있는 세상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오직 머리로서의 그리스도를 인정하는 교회에서만 이러한 삶이 기본 틀로서는 갖추어져 가능하므로 성경이 "형제 사랑"을 강조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하지 않은 것이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위하지 않은" 것으로 당연히 간주되어 멸망에 이르는(마 25:45) 것이 이 때문입니다. 

우리가 자연계와 이를 초월하는 세계 곧 초자연계가 병립되어 있음을 3위1체의 원리로 알고 있는 이상, 초자연계에 속한 영혼이 있으면서도 자연계에 속한 육체의 삶을 살 수밖에 없는 비극적 현실은 실로 흉한 몰골입니다. 이런 영혼이 없다면 차라리 영생이나 동경하지 않고 사모하지 않으면 좋으련만 영원성의 초자연계의 특성상 영원한 생명을 갈망하고 자연계의 죽음에 대한 공포와 비애를 느낌이 엄청납니다. 이렇게 불행한 존재로서의 모순된 삶을 살도록 하나님께서 인생들을 절대로 만드실 리 없습니다. 

범죄한 대가로서의 죽음의 결과입니다. 지금까지 이 기본적 사실에 대해 완전히 눈을 감고 사탄이 속이는 대로 속아 왔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아닙니다. 성경을 푸는 열쇠만 될 뿐 아니라 모든 자연 및 초자연적 현상들을 풀어 나가는 관건이 되는 것이 3위1체의 원리임을 알았으니 이 만유의 법칙에 입각하여 모든 문제를 규명해가야 합니다. 이 원리에 의하면 이 영원하지 못한 한시적인 세상은 절대로 살 만한 곳이 아니고 때도 아닙니다. 정상이 아니고 비정상의 현재 실상입니다.

살 만한 세상인데도 일부러 우리를 시험해보시고자 세상 삶을 사랑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상 도무지 살 수가 없는데도 사탄의 꾐과 속임수에 넘어가 혹은 진리 및 실상을 알지 못해서 세상을 사랑하고 있는 것뿐입니다. 이제 눈을 뜬 이상에는 과거와 같을 수가 없습니다. 세상을 사랑함으로써 즉 살고자 함으로써 모든 것은 무너지고 모든 것은 상실됩니다. 세상 사랑은 구원 얻는 믿음,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의 관점에서 말하면 물 위에 나무를 심는 격이 됩니다. 땅에 심는 나무입니다. 

사탄은 어찌 하든지 세상을 사랑하도록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마지막 아담의 광야 시험에서 확인되듯이 세상을 사랑하지 않으면 반드시 세상에서 고난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둘 중 하나입니다. 마지막 아담께서 당하신 것처럼 세상의 안목으로 볼 때는 파멸뿐입니다. 십자가상에서 처형되시는 것으로써 그 모든 세상 활동의 마지막을 장식하셨으니까. 온 세상을 뒤흔들어 놓던 하늘을 찌를 듯하던 인기도 한 때의 물거품이었음이 드러났습니다. 구름 떼처럼 몰려 다니던 환영의 인파도 한 순간에 쥐 죽은 듯 정적에 잠들어 버린 것입니다.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오직 극소수 5백 명 정도만이 끝까지 따랐을 뿐이기에 승천하시는 주님을 뵐 수 있는 은혜를 입은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의 위치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를 핍박했으니 너희도 핍박할 것이다" 하고 종과 주인(요 15:20), 스승과 제자(마 10:25) 관계로서 말씀하신 것은 다시 머리와 몸의 관계로 직결되는 의미입니다. 머리와 몸이 따로 놀지 않고 영욕(榮辱)을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고전 12:26). 이 사실을 성경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운다"(골 1:24)는 것으로써 표현합니다. 이 머리께서 당하신 고난은 장차 그 몸의 각 지체 각 부분이 될 우리 각자 곧 나의 구원으로 나타났고, 따라서 그 "남은 고난"은 그 몸된 교회가 나누어 겪게 되어 있어 많은 사람의 구원을 위해 또한 유효한 것으로서 그 막중한 가치야 이루 형용할 수가 없습니다. 고로 이 세상에서의 환락은 죽음(멸망)으로 통하고 그 대신 고난 받음(마지막 아담 안에서의)은 생명으로 통하는 것이니, 이렇게 빈 틈 없는 조화로 비록 죽음의 이 세상이지만 엄정하게 제 역할을 다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자 즉 삶의 낙을 누리고자 하는 이마다 멸망할 것이요 그리스도와 그 복음 전함을 인하여 고난 받음으로써  자기 목숨 미워하는 자는 영생 가운데에서 그 생명이 영구 보존될 것입니다(요 12:25). 바울이 그토록 많은 고난을 받은 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을 전하려고 노력한 덕분입니다.

①사탄이 이 세상의 신(神)으로서 왕이 되어 사탄의 나라가 되어 있으니 사탄과 원수인 하나님의 의인들을 곱게 놓아 둘 리 없어 못살게 구는 것이 뻔하고 그래서 "나그네"(히 11:13)라 한 것이며,
②따라서 자아중심의 나라인데 세상과 더불어 살자면 부득불 자아중심이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따돌림을 받게 되어 있고, 그렇다고 나도 자아중심으로 나갈 것입니까ㅡ그러면 필연적으로 자멸을 초래하게 됩니다. 
③초자연계가 분명히 존재하여 과거 아담이 초자연계 몸으로 있었음을 알진대, 정작 살려면 초자연계 몸으로 환원되어 살아야 비로소 사는 것인즉 이와 같이 자연계 몸으로 남아 있어 무슨 삶의 낙을 제대로 누릴 것입니까. 


사람들은 대개 대소변 보는 것을 예로부터 더럽다, 창피하다고 하며 부끄러워합니다. 지금은 스승을 알기를 무엇 같이 여기지만 과거에는 사도(師道)를 중시하여 사람되라고 가르쳤기에 초등학교 학생들이 선생님을 우러러 보았으므로 선생님은 대소변도 보지 않는다고 생각한 아이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아이들도 본성적으로 그렇게 알고 있는 것입니다. 남녀가 성적으로 관계하는 것도 한 편으로는 짐승 같다고 여기기에 예로부터 그런 일을 방사(房事)라고 했습니다. 다 하는 일이지만 그래도 은밀히 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 편에서 보면 이것은 모순이 됩니다. 창조하실 때 왜 이렇게 부끄러워하도록 만드셨느냐 이 뜻입니다. 짐승들은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방귀를 뀌는 것마저 그 소리가 나오는 배설구를 연상하는 것이기에 사람들은 가능하면 그 소리 내는 것을 참는 정도입니다. 이승만 전대통령이 참을 수 없어 방귀를 뀌니 옆에 있던 한 사람이 방귀 뀐 임자의 무안함을 덜어주기 위해 "각하, 시워하시겠습니다" 한 것을 두고 아첨의 본보기라 해서 널리 회자되었지만 이 또한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인간의 편협한 시각입니다. 아첨이라기보다 염치없이 나와버린 현장에서의 어색한 분위기를 수습하고 어른의 당혹스러운 감정을 역지사지로 어는 정도 완화시켜 준 재치 있는 응수라고 긍정적으로 보아주는 여유가 필요합니다. 

천사들(靈物)은 대소변을 보지 않습니다. 필요한 에너지를 얻기 위해 먹기보다는 순수한 식도락을 위해서일지도 모릅니다. 육체가 완전히 투명해지기도 하는 판에 먹고 마신 찌꺼기가 배설되느라 걸리는 시간도 필요 없을 것입니다. 그들은 짝짓는 일도 없습니다. 아담 역시 초자연계 몸으로 있어 짝 짓기 위해 남녀로 분할된 것이 아니라, 단지 상대할 짝을 이루기 위해 대칭성 원리에서 하나님께서 아버지와 아들로 계시는 것처럼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서 하나님의 모습을 따름이어서 "홀로 지내는 것(獨處)이 좋지 않다" 하셨습니다. 여자가 없었다면 아담(여자도 남자도 아닌 남녀 본질을 하나로 조화시켜 있으므로)이 초능력으로 자식 생산을 했을 것이나 여자가 있음으로 해서 여자가 그 역할을 했을 것이요 (자연계의) 동물적인 교접은 없는 것입니다. 왜냐면 초자연계 몸으로서의 광채가 벗겨져 나간 자연계 몸의 벌거숭이가 되어 있음을 "부끄러워"했기 때문입니다. 

자연계 몸이 되면서 자연계 동물과 같은 방식으로 자식을 생산하게 된 것입니다. 남녀간의 애정 교환은 초능력의 초자연계 몸이기 때문에  자연계 육체처럼 굳이 육체적으로 접속을 해야 느끼는 것이 아니라 서로 보기만 해도 그 눈빛만으로도 육체적인 교접이 가히 미치지 못할 최상의 희열을 느낄 수 있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 자연계에 속한 동물 같은 모양에다 동물 같은 행동을 하게 된 것을 이제 자연계에 속한 인간으로서 부끄러워하게 되는 연유입니다. 고로 하나님은 이렇게 인간을 만드시지 않았고 인간이 범죄하여 이런 부끄러움을 스스로 불러들였으니 슬픈 현실입니다. 

자연계 몸이 되면서 "대소변", "남녀 잠자리" 등이 수반된 것입니다. 이런 비극적 실상은 모르고 인간도 동물과 무엇이 다르냐 하고 심지어 벌거벗고 지내는 나체족이 되는 것도 불사하니 악령 사탄, 이 세상 신에게 완전히 휘둘려서 그런 볼썽 사나운 짓도 하게 됩니다. "인간이 일반 동물과 무엇이 다르냐" 하고 이를 '의식하는' 것 자체가 한 때 인간이 초자연계 몸이었다는 사실을 방증함이 됩니다. 그렇게 '인간'과 '동물'을 구별하여 말할 줄 안다는 그것입니다. 인간이 애당초 초자연계 몸이었다는 사실을 강조하여 이런 사실도 지적합니다. 

사탄은 이런 비극적 결말을 침소봉대하여 오늘날 온갖 음풍(淫風)을 온 세계에 확산시키고 있습니다. 한낱 고깃덩이인 동물에 불과한 존재로서 인간을 부각시켜 영혼을 고사(枯死)시키려는 술책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한 사람의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서 족했지만 지금은 구원을 얻었다고 자처하는 사람마다 개개인 모두가 다 세례 요한의 몫을 해야 하는 때입니다. 

세상이 이러고도 잘도 굴러간다고 착각할 일이 아닙니다. 억지로 추스려 간다고 보아야 옳습니다. 그 강제력의 하나가 3운법칙입니다. 이렇게 무리하게 억지로 끌고가는 것이므로 임시변통인 것이며 목적이 있기 때문이고 이 목적이 끝나면 끝나기가 무섭게 이 세상은 막을 내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 목적이 다름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복음)이 온 세상 에 전파되는"(마 24:14) 일입니다. 지금은 그 전파의 정리 기간으로서, 잘못 전파된 것은 바로잡아 주는 일을 겸해서 전파된 구원의 말씀을 듣고도 여전히 고집스럽게 "불의를 좋아하는 이들"(살후 2:12)을 적 그리스도를 통해 도태시키는 때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한 사람의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서 족했지만 지금은 구원을 얻었다고 자처하는 사람마다 개개인 모두가 다 세례 요한의 몫을 해야 하는 때입니다. 

이상의 말씀(마 24:14)으로서 이 세상이 왜 존속해 오고 있는지 왜 인생들이 지구상에 사는지 그 목적이 명백해진 것입니다. 초자연계 몸으로 영생하도록 창조하신 인생인데 현재 이 자연계 몸이 되어 이 고생을 하고 있으므로 초자연계 몸이 되는 것이 그 무엇보다 시급한 것이고 이것이 유일의 의미요 목적입니다. 그리고 이런 자연계 몸으로 전락해 있는 이유가 범죄함에 있는 것이니 누구든지 영생하고자(초자연계 몸으로 회복되고자) 하는 이는 오늘날 그 범죄의 대가를 누구나 명약관화로 보고 있는 만큼 절대로 범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초자연계 몸으로 회복되고 범죄하지 않는 방법, 즉 천국에 들어가는 유일한 요건이 있습니다. 그것이 "마지막 아담"(고전 15:45)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로 인하여 우리가 새로 창조되고 다시 출생하게 되므로 우주 천하에 방법은 오직 이 하나뿐입니다(행 4:12).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모든 성경적 사실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인간 앞앞이 개인적 선물로 주시는 성령(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와 하나로 존재하시는 모습)으로 받아 모시면 됩니다. 이 때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는 회개를 해야 하고 그런 뜻으로서 세례를 받음으로 과거의 모든 죄가 용서됨으로써 성령을 받습니다. 이것이 다시 출생하고 새로 창조됨입니다.
   
자기가 이렇게 다시 출생하고 새로 창조되었으면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이 다른 모든 사람도 그렇게 되도록 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고 이 일을 위해 그들을 위해 기도해 주는 일을 하는 것이 필수입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날 모든 인간이 살아 있는 목적입니다. 또한 이 때문에 이 세상이 존속해 있는 것입니다. 이 외에는 세상도 인간도 존립해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이와 같이 새로 창조되지 않았으면 한시바삐 새로이 창조되라고 기회를 주시는 목적에서 그리고 새 창조를 받았으면 다른 사람도 새 창조를 받도록 일하라고 즉 사람 살리시는 이 하나님의 일을 하라는 목적에서 이 세상이 있는 것이요 이 지상에 인생들이 있는 것입니다. 이 외에는 달리 아무 목적도 있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 살고자 하고 삶의 낙을 누리고자 하는 것은 새로 창조되지 못한 즉 다시 출생하지 못한 다시 말해 구원되지 않은 증거일 뿐입니다. 이와 같이 명명백백한 하나님의 뜻(마 24:14)을 무시하는 것은 당시 첫 사람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명백해진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고 범죄하여 죽은 자가 된 것과 똑같아 "죽은 자"(마 8:22)입니다. 그 증거입니다. 구원 받은 자는 "산 자"(고후 5:15)입니다. 죽은 자와 산 자가 같을 수 없습니다. "죽은 자"이면서도 스스로 "산 자"로 착각하는 이가 오늘날 거의 전부를 차지하기 때문에 일부러 이 점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④그러므로 주변의 사람들을 구원시키는 일을 하라고(요 20:21,22/행 1:8) 우리를 구원하셨으면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이 세상에서 산다는 생각을 아예 접어놓고 시작해야 하며,
⑤이 구원의 사업을 사탄 일당이 한사코 방해하고 저지하는 터에 이를 위해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지라 그래서 핍박과 환난이 연이어지는데 세상에서 안락하게 살기를 바란다는 것부터가 언어도단입니다.

⑥우리의 믿음을 시험하고 연단하기 위해 끊임없는 사탄의 적대시하는 집적임이 가해지는 판인데 이렇게 원수로 대하는 세상을 상대로 사이 좋게 지내는 세상 사랑이라는 것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고,
⑦우리의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께서 세상에서 천대, 무시를 당하시며 하나님의 일을 하셨으니 그 몸된 우리도 역시 같은 처지가 됨이 당연하므로 "세상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하리라"고 미리 말씀하셨는데 이 사실이 변할 리 없고,
⑧이와 같이 사람 살리는 하나님의 구원의 사업이 상대와 하나됨을 수단으로 해서 이루어지므로 상대가 죄인으로서 죽음의 저주 아래 있으니 거기 나도 동참해야만 그래서 함께 형벌의 저주를 나누어 짊어지고 죄인의 위치에 서야만 되므로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하셨는데 사형수의 위치에 있으면서 세상에서 편하게 살고자 하는 것은 자가당착이고,
⑨3위1체 원리의 대칭성에서 이 세상에서 잘 지내고 위로를 받아 부유하게 살면 오는 세상에서는 "위로 받을 것이 없다"(눅 6:24) 하신 대로 반드시 이 세상과 반대되는 것만이 내 몫에 태일 것이 분명한즉 일부러 사서라도 고난을 받아야 할 처지이기에 역시 그렇고,
⑩본질적으로 악인은 의인에게 가증스러움(미움)이 되고 의인은 악인에게 가증한 것(증오의 표적)이 되는데(잠 29:27) 의인으로서 어찌 악인들 틈에 끼어 더군다나 악한 자가 왕 노릇하는 데에서 형통하며 살기를 바랄 것이며, 형통하지 않고서 어찌 삶의 낙을 기대하겠습니까. 

⑪머리와 몸의 한 몸 체제로 되어 있는 만물 곧 하나님의 창조물들이므로 그 수장(首長)이 되는 인간(아담)이 범죄하여 죽음에 이르니 같은 저주를 나머지 모든 피조물이 받는(창 3:17) 것은 정한 이치입니다. 그래서 만물이 다 이제까지 고통을 받습니다(롬 8:22). 고통도 보통 고통이 아니라 인간 고통 중에 손가락으로 꼽히는 것이 치통(齒痛)과 산통(産痛)이라는데 바로 이 해산(解産)의 극통(極痛, birth-pang)인 것입니다(:22). 그런데도 정작 장본인이요 주인공인 인간이 이 고통을 면하려 하고 이 세상에서 삶의 쾌락을 즐기려 하다니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일입니다.
⑫이미 초대교회 때부터 하나님의 의인들은 극심한 고통을 받아 왔고 지금도 북한 등지에서는 명백히 그러하여 이는 기정 사실화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한 몸으로 연결되어 있는 교회 구성원으로서의 나의 현재 위치일진대 고통을 받아도 영광을 받아도 모두 함께 받는다는 '한 몸'의 이치를 따라(고전 12:26) 나 역시 반드시 고난을 받아야 하고 절대로 회피할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온갖 악형(히 11:35)을 받을 것을 항상 염두에 두고 이 세상 지내야 하는 것이라면 그 때까지는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았다고 할 때, 그러면 핍박을 당하는 그 순간 모든 재산은 깡그리 사라지고 강제 노동 수용소에 끌려가 여생을 마치게 된다면 그 소위 "부귀영화"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삶의 낙을 누리려면 사는 것 같이 살려면 그런 핍박 받는 것도 없고 여하한 불행도 없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고로 소위 "하나님 축복 받아 잘 산다"는 교리는, 성경도 모르는 아이들 사탕 발림에 불과한 아주 유치한 도저히 "어른답지" 못한 망상인 것을 이 한 가지로도 충분히 유추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서울에도 그런 소위 "교회"(이름만이 교회일 때 ""표를 붙여)가 수십만 등록 교인을 자랑하는데 악의 바벨 탑 외에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런 것을 마치 "성공한" 목회인 양 본으로 삼다가는 '쥐도 새도 모르게 독수리에 나꿔채이는 토끼'가 됩니다. 무엇이든 세상에서 과시(자랑)할 때 그것이 바로 적 그리스도 사상입니다. 많은 사람이 이 속임수에 끌려 가 자기의 영원한 운명을 망치고 있습니다. 그런 소위 "교회"를 한국의 소위 최대 교단이 이의없이 수용할 정도로까지 성경에 대한 무지 속에서 우왕좌왕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현재의 실정입니다.

⑬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상 사실을 명백히 하셨으니, 어떤 사람이 세상 사랑을 염두에 두고 즉 능력을 행하시는 이 분을 따르면 세상에서 흥청망청 살 수 있으리라는 욕심으로 "제가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하고 자청해 왔을 때 딱 부러지게 말씀하시기를 "여우도 굴이 있고 새도 둥지가 있되 인자(人子, 사람의 아들 곧 모든 인간의 대표로서의 자신을 가리키심)는 머리 둘 곳도 없다"(눅 9:58) 하신 것입니다. 새나 여우는 자기 세상에서 정상적인 삶을 살고 있지만 인간은 초자연계와 자연계에 아울러 속해 있어 초자연계 삶이 기본이므로 이렇게 자연계에만 처음부터 소속되어 있는 그런 새나 여우와 달라 비정상이어서, 본격적으로 삶을 살 수 없는 상태 곧 "죽은 자"(:60)임을 명백히 하신 것입니다. "솔로몬의 모든 영화로도 그 입은 것이 이 백합화만도 못하다"(마 6:29) 하신 것도 같은 맥락의 말씀이십니다. 자기 세상에서 정상으로 자기를 단장한 백합화이기에, 비정상으로 인간이 아무리 호화찬란하게 몸을 치장해도 결코 비교가 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와 같이 인간은 이러한 동식물만도 못합니다. 만물을 다스리는 자로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인데 그 아래 존재들보다 못해서야 말이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못하다" 하셨으니, 정상이 아니고 범죄의 결과 죽은 자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⑭아라비아에서 3년간이나 성령의 가르치심을 받은 바울 사도 역시 교회에 가르치기를(고린도전서 7장) 세상 물건을 쓰는 자는 다 쓰지 못하는 것과 같이 하라 했고 아내 남편이 있는 자는 없는 것 같이 하라 했습니다. 또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니 족한 줄 알라고 했습니다(딤전 6:8). "일만 악의 뿌리'(딤전 6:10)인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 알라"(히 13:5) 했습니다. 더 이상 욕심 내지 말라는 뜻입니다. 살려면 잘 살아야 하고 잘 살려면 돈이 풍성해야 하는 것이니 그러므로 이 말은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입고 잘 살고자 하는 헛된 마음을 품지 말라는 경고입니다.
⑮성경은 우리의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감추어져 있다고 했습니다(고 3:3). 생명이 감추어져 있으니 생명과 반대되는 것은 죽음, 그래서 "죽은 자"(:3)입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몸에 채우는 자로서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눅 9:23) 영문(營門, the camp) 밖으로 나가는(히 13:13)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영문 밖이라는 것은 세상 밖이니 세상을 산 자의 세계라 한다면 그 밖이라 하면 죽은 자인 것입니다.

사탄과 그 아래의 것들과 천사장 미가엘과 그 휘하 "거룩한 천사"들이 대판으로 싸워 사탄 일당의 완패로 끝나 "하늘에서 더 있을 곳을 얻지 못해 쫓겨났다"(계 12:8)는 것은 초자연계로부터서의 추방입니다. 즉 에덴낙원에는 영구히 들어가지 못합니다. 그러나 자연계인 이 우주 천체를 상대해서는 얼마든지 거의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보면 됩니다. 화성 같은 데에다 조형물을 만들 수도 있고 달 같은 데에다 로봇 생체 인간을 만들어 놓을 수도 있고 아니면 죽은 인간의 시신을 갖다 놓을 수도 있고 별의별 짓을 다 해 놓을 수도 있어 창조자 신(神)임을 과시할 수 있으니 절대 거기에 속아 넘어가지 않아야 합니다. 불의를 좋아하는 악인(회개하지 않으므로)이 걸려들게 하는 함정이요 울무들이고 덫입니다(살후 2:11,12). 하나님의 인지 아래 되어지는 일입니다.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서운 일"(히 10:31)입니다. 이 역시 정확한 정보에 속합니다. 





2016년 6월 22일 수요일

<성경의 자체 증명>이라는 태양을 이길 <거짓과 속임수>의 어두움은 존재 않는다






그러면 아무도 믿지 않을 내용인데 성경은 어쩌자고 그런 내용을 담아 두고 있을까ㅡ답은 간단합니다, 진실이므로 사실 그대로 밝힐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성이 있는 지성적 인간인지라 생각하는 여유만 있으면 이렇게 고난 고통을 미리 일러주는 것은 거짓말이 아닌 진실이라는 증거가 됨을 어렵지 않게 간파할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영물들 중에 악령이 생겨났듯이 인간도 "불의를 좋아하는"(살후 2:12) 이들이 있어 그 욕심이 세상 사랑으로 몰아가기 때문에(사탄은 인간이 이와 같은 선택을 하도록 선동하고 이에 따라 눈을 어둡게 만드는 것) 이런 생각을 할 기회마저 스스로 버리는 것입니다.

그 결과 이성마저 마비되어버립니다. 그렇지만 않다면 얼마든지 각자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문제로서 결코 어려운 일도 아닙니다. 사리 판단을 3위1체의 원리대로 하면 됩니다. 이 세상이 영원하지 못하므로 반드시 이와 대칭성을 이룬 영원한 세상이 있다는 증명이 될 수밖에 없고, 오는 세상이 본격적으로 삶을 향유하는 때라면 이 짧은 세상은 그 반대인 고난, 고통이 정상이지 결코 이상한 일, 비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만물은 반드시 짝을 이루어 있고 그리고 그 성질은 서로가 정반대이기 때문입니다. 고로 본격적인 삶을 향락하자면 이 세상에서는 고난 고통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음을 보입니다. 반대로 이 세상에서 무리하게 자기 목숨을 사랑하여 안락함을 추구하면 오는 영원 세상에서는 죽음과 저주의 멸망밖에 없다는 증명이 됩니다(눅 6:24,25). 이 세상에서도 축복 받아 잘 살고 오는 세상에서도 축복 받아 형통한 삶을 누리는 법은 없으니 이 점 명심할 일입니다. 

죽기를 무서워하여 평생 죄에게 종 노릇하였지만(히 2:15) 이제는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할 수 있게 되었으므로 새로운 죽음과 생명의 대칭(상칭, 대립)이 이루어져 있는 것입니다. 고로 영원한 생명의 낙을 누릴 좋은 날을 바라는 자는 반드시 이 세상에서 인내로써 참고 견딤으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우며" 사람 구원하는 일에만 전념할 것입니다. 물론 사랑이 그 동기가 되어야 합니다.

"내 구원을 스스로 이룬다(빌 2:12)"는 뜻을 잘못 이해하여 자기 구원을 의식한다면 구원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구원을 모르는데 구원 받았을 리가 없습니다. "구원을 이룬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감동 감격하여 사랑의 순종을 하고 그 사랑의 마음이 끝까지 변치 않음을 말하고, 그런 사랑을 유지하지 못하여 자아중심이 되어버리면 그 결국이 파멸임(악령들처럼)에 비추어 볼 때 결과론적으로 말해 "내가 구원을 이룬" 것이 된다는 뜻입니다.

부정적인 의미의 이 후자를 가리켜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함이 멸망"(빌 3:18,19)이라고도 합니다. "죽기를 무서워한다"는 것은 우리가 목숨 끊어져 육체가 썩기 시작한다는 단순히 그런 것만 의미함이 아니고 모든 고통, 고난, 불행 등이 죽음에 속합니다. 본격적인 생명(하나님이 아담을 만드시던 당초의 초자연계의 육체로 된)에는 그런 것이 없었습니다.

이렇게 여러 가지 조건하에 한 순간이라도 끝나버릴 이 자연계 목숨이 인간에게 생명일 리 만무합니다. 왜냐면 육체가 연약하다보니 각종 고통과 고난의 대상으로서 그 뿌리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현미경으로나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병원균에 의해서도 한 목숨 끊어지기는 예사입니다. 고로 인간에게는 이 자연계가 죽음이지 생명이 아닙니다. 개체적으로는 한시적 생명이지만 생육 번성함으로써 그 종(種)이 지금까지도 유지 존속되고 있는 자연계 동식물은 이런 인간과는 완연히 다릅니다.

그들은 '초자연계에 속한 영혼'이 없는 반면 인간은 있는지라 따라서 필연적으로 육체도 초자연계적 요소를 지녀 초자연계에서 초자연계 존재로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담의 범죄로써 이런 자연계 육체의 죽음으로 전락한 것입니다. 인간이 이렇게 되자 자연계 동식물과 동일한 생태계에 속해버려 동물들의 목숨 끊어짐도 인간을 따라 "죽음"이라 호칭하게 된 것입니다. 원래는 그들에게는 죽음이 아닌 '신진대사'쯤으로 인식되는 것이었습니다.

자연계의 동식물과 대칭되는 초자연계의 동식물이 바로 에덴낙원의 "짐승들"(아담을 위해 창조된)이요 그리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또는 생명 나무 등 영적(靈的) 식물인데, 인간은 이들과 달라 그 대칭성의 요소가 자기 자신 안에 겸비되어 있음이니 즉 육체는 자연계에 속한 것으로 창조되었으나 영혼은 초자연계의 것으로 즉 하나님 친히 아담의 코에 숨을 내쉬심으로써 조성되었은즉, 이는 아담(인간)이 하나님의 "6일 창조"로 지으신 만물을 다스리는 '하나님이 대리자'였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이렇게 초자연계의 영물들 다시 말해 거룩한 천사들과 악령들을 다스리는 신분이었으므로 양 세계에 함께 속해 있어야 함이 필연적이었습니다. 이러한 성경적 진실은 소위 "외계인"이 인간을 창조했다는 둥, 인간 앞서 그들이 존재했다는 둥 갖가지 거짓말과 속임수를 무위로 돌릴 수 있는 막강한 파괴력을 지닙니다(물론 저들의 거짓말에 넘어가 불행히도 그런 것을 진실로서 받아들이는 경우에는 속수무책이나). 소위 "외계인", "외계 문명"이라는 것 자체가 과거 에덴낙원에서 창조된 악령들의 초능력에 의한 속임수임이 이로써 또한 폭로되고 있습니다.

악령들의 초능력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의 거룩한 천사들의 초능력과 충분히 맞먹는 것으로서 거짓된 것까지 합치면 훨씬 능가하는 것으로 비쳐지게(나타나게) 되어 있고 이를 기화로 저들은 성경의 하나님보다 또는 초능력보다 월등하니 그런 고로 성경보다 권위 있는 초월자임을 입증함이 아니냐 하고 윽박지르게 될 것입니다. 이런 논리에 넘어가지 않아야 합니다. 결단코 초능력이나 기타 다른 무엇으로 잣대를 삼을 것이 아니라,  위의 그림에서 명시되고 있듯이 오직 자아중심이 혐오하는 '타인과 함께 하나되어 타인의 고통을 함께 짊어지는' 이치로서의 고난 고통을 현세에서 받는 것이 진리인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적 그리스도가 나타나기도 전에 이미 그가 진실로 "악한 자"임을 간파해버릴 수 있는 혜안(慧眼)과 안목을 갖게 됩니다. 왜냐면 이 악한 자는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의 인간 범죄로 인한 현재의 죽음의 불행과 고통을 부인하려들 것이므로 그렇습니다. 단지 현재 상태대로의 인간 고통에서 구원되는 것만을 강조하고 이 고통에서 해방되는 방법으로 자기의 출현을 부각시켜 당장 고난 없는 영원 행복의 삶을 약속하는 것으로써 속이려 들 것이기에 그러합니다. 

하나님의 진리는 반드시
 고난을 통과한 다음의 영원 행복으로서 나타남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눅 24:26) 하심과 같습니다. 마지막 아담의 말씀이시므로 그 몸된 우리 역시 동일한 과정을 거쳐야 함을 명시하신 것입니다. 과거의 2천년 교회 역사로써 필요한 고난은 이미 닦아 놓아졌으니 이제는 영광의 마지막 아담의 재림, 재출현만을 남겨두고 있는 때로서, 더 이상 그 어떤 현란한 속임수와 거짓으로 "악한 자"가 임해도 모두 필요 없는 군더더기 즉 '속임수'임을 단정지을 수가 있습니다. 더 이상의 것은 전혀 무의미하기에 그렇습니다.

이것이 진위를 가리는 유일한 척도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초능력' 여하, 여부가 아니라 저주 아래 있는 죄인 즉 '약한 자와 함께 된 약자로서의 고난'(고후 13:4) 유무입니다. 적 그리스도의 자아중심은 무조건의 강함만을 보이고 이를 강조함이 특징입니다. 바로 이 점을 예언하시어 "다른 이가 자기 이름으로 오면 너희가 수용하리라"(요 5:43) 하신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처음부터 그리스도가 위의(威儀)와 영광으로 나타나 주기를 바랐던 것이나 마지막 아담께서는 그 정반대로 임하셨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냥 무조건하고 영원히 살게 해주시고 세상의 강대국으로부터 압제 받는 이스라엘을 해방시켜 주시고 그래서 이스라엘 국민이 세계를 지배하게 되는 것쯤으로 잘못 인식한 것입니다. 


인간의 죽음의 '본질과 실상'을 밝힌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니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치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다.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다. 이것들을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신다"(골
  3:1-6).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습니다. 땅에 있는 지체들이 나를 결국 멸망하게 만듭니다.  다시는 멸망하지 않게 되는 보증쯤으로 "구원"을 오해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죄의 대가가 죽음"(롬 6:23)이라는 것이 변개될 수 없는 철칙임은 나 위한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영원히 확증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내가 산 자가 됨은, "다시는 '죽은'(그리스도와 함께) 나를 위해 살지 않고 나를 위해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를 위해서만 살도록"(고후 5:15) 되어 있어, 이전의 것과는("이전 것은 지나갔음"-고후 5:17) 완전히 다른 새 창조물됨을 말함입니다.

만일 여전히 나 자신을 위해 산다면 내가 아직 새 피조물이 아니라는 다시 말해 구원되지 않았다는 자체 증명만 될 따름입니다. "구원 받음"은 옛 창조가 망가졌으니까 새롭게 창조하시는 의미이고, 그 방법이 "영(성령)으로 나게" 하시는 것이므로(현재 아담의 육체를 물려받은 나이므로 "육으로 나" 있는 것을 토대로) "다시 출생(重生ㅡ거듭 남)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아담의 창조에서 먼저 자연계 육체를 만드시고 다음 순서로 그 코에 하나님 친히 숨을 내쉬심으로 초자연계에 속한 영혼(영)을 주입하심(생성시키심)과 똑같은 순서입니다.

그래야 6일 창조의 '연속'이 되는 것이지, 그렇지 않으면 완전히 별개의 창조가 되어버려 현재의 나를 토대로 "새 사람"을 만드신다는 것은 불가능이 됩니다. '연속'이 되어야만 '처음 창조의 결과물'인 나의 육체를 그 성전(聖殿)으로 삼아 성령께서 오심으로써 나는 마지막 아담과 "합하여 한 영"(고전 6:17)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경우 성령은 아버지와 "하나"(요 10:30/갈 3:28)가 되어 계시는 아들 곧 마지막 아담이십니다.

영혼이 조성되던 순간의 아담이 죄 없는 몸으로서의 "거룩한" 상태였던 것처럼, 성령께서 임하시게 되는 내 몸도 세례로 말미암아(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합하여-롬 6:3,4) 나 자신 죽음의 대가를 치름으로 인해 죄 용서가 되었으므로 "거룩한" 상태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내가 이미 죽은 자이므로 나의 죽음에 동참하시는 그리스도의 죽으심(나 위한)이지만, 이 죽음은 죄의 대가로서의  죽음이기에 형벌로서의 죽음인즉 이 경우 나는 그리스도의 그 형벌의 <고통>의 죽으심에 은혜로(왜냐면 나 자신은 그 고통을 당하지 않았기에) 동참함이 됩니다. 

나 위한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인간의 죽음이 자연계에 속한 동식물과 같은 자연적 죽음이 아니라 형벌의 죽음, 죄의 대가로서의 죽음, 창조 당시부터 정해진 것이 아닌 즉 정상이 아닌 비정상 상태임을 확증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아담이)범죄하지 않았다면 결코 죽을 수가 없다는 사실을 엄정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점에서도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형벌을 받으셨다는(사 53:8,11) 의미는 성립될 수 없습니다. 우리 때문에 우리를 위해서, 우리가 받을 형벌을 받으셨다는 의미는 맞습니다.

우리는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으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통해 우리의 죽음의 실상을 알게 된 것입니다. 고로 '죽음'과 그 죽음의 '형벌적 측면으로서의 고통'을 별개로 나누어 생각할 수 없습니다. 비유하자면, 아기를 안은 엄마가 강을 건너는데 엄마 품에 안긴 아기는 엄마가 강을 건너느라 겪는 온갖 고통을 모른다고 할 수 있으나 "강을 건너 갔다"는 사실만은 아기나 엄마나 동일합니다. "엄마가 아기를 대신해서 건넜다"는 말은 통하지 않습니다. 둘이 함께 건넌 것입니다. 만일 마지막 아담께서 사형수(死刑囚)로서의 십자가 죽으심이 아닌 자연사를 하셨다면, 그 죽으심은 무의미한 것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이 대목은 아주 중요합니다. 

우리의 죽음이 죽음 자체로써 끝나면 죄의 대가로 우리가 죽는다는 사실로만 그치지만, 그렇지 않고 우리와 하나되심으로 즉 우리와 함께 죽으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함께 다시 살아날 수 있게 되니까(성령을 받아 모심으로 구원되고 영생하는 자로 새로 창조되어 다시 출생함이 있기에), "죄 씻음과 용서"(우리 위해 흘리신 피로써ㅡ생명이 피에 있으므로[레위기 17:11] 그렇고 우리 위해 생명을 바치심 즉 우리에게 당신 자신을 몽땅 주심이니까 그 주신 생명을 소유함으로써 우리는 영원히 사는 것) 및 "거룩해짐"이 가능하게 됩니다. 

이러한 '죽음'은 "하나님"으로서 가장(假裝)은 하지만 적 그리스도가 결코 모방할 수 없는 것 중의 하나입니다. 어떤 속임수로써 "그리스도"로 자처하며 나올지는 모르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자기의 자아중심의 속성만은 숨길 수 없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즉 양의 탈은 썼지만 뒤에 삐죽이 나와 있는 이리의 꼬리만큼은 숨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자아중심으로는, 인간(아담)이 범죄하여 죽음의 형벌에 처해짐으로써 현재 겪고 있는 이런 고난 가운데에서 한 몸으로 함께 하는 동참의 이치를 실천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또 마지막 아담께서 홀로 이런 고통을 받으시는 것으로써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몸된 교회로서의 모든 사람 각자 역시 이 머리의 고난에 동참하도록 되어 있어, 때문에 고난 받으시고 부활하신 후 지금까지 각 시대를 통해 교회는 일관되게 수난(受難)의 때를 보냈고 현재도 그러합니다. 이것을 적 그리스도는 모방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즉각 나타나 즉시 영생 또는 행복한 삶에 들어가는 것처럼 속이는 것이고, 장기간에 걸쳐 인내로써 고난을 견디도록 하는 이 필수적이고도 귀중한 측면은 흉내내지 못한다는 것이 그의 "이리의 꼬리"입니다.

고로 이것이 또한 그리스도와 악한 자 곧 적 그리스도와의 명백한 차이입니다. 자아중심은 사랑(하나됨) 가운데에서 고난 고통도 함께 나누는 그런 일을 못함을 다시 강조합니다. 그 본색을 적 그리스도는 그대로 노정시킬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빼놓을 수 없는 '함께 하는 고난'의 중요한 의미가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지금까지의 장구한 세월을 참아 오신 것입니다. 또 교회에게 인내를 가르쳐 오신 것입니다.

앞서의 설명대로 인간의 이 죽음(영생 못하고 삶 자체가 고난의 연속인)이 정상이 아니고 범죄로 인한 저주로서의 비정상이기 때문에 이런 저주 속에 놓인 인생들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한 몸의 이치로 구원함이므로 반드시 그 구원 대상자의 저주의 고난과 함께 해주어야 하는 것이 필연인데 이 함께 하는 고난을 자아중심은 도무지 흉내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마지막 아담의 우리 위하신 죽음이 참혹한 십자가 죽으심이라는 사실이 이런 죄인으로서의 인간의 저주의 형벌을 받는 것임을 명확히 증명해 보이신 것입니다.

친히 우리와 하나되시어 같은 고난 고통을 우리와 함께 당하시는 사랑의 모습인데 적 그리스도는 이를 모방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을 위해서 죽는 척하는 무슨 시늉은 해 보일지 모르나(계 13:14?) 단순한 겉치레 흉내일 뿐입니다. 그리스도의 당하신 죄의 죽음으로서의 형벌은 마지막 아담으로서 아담의 위치에서 당하시는 것이므로 모든 인류가 당하는 의미이고 머리로서 그렇게 하신 것이며 그 몸된 교회가 그 머리의 고난 받으심에 함께 하여 동참함은 당연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 했으므로 교회의 이 고난 받음이 인생들의 구원(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는) 차원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성경에서 고난 받음을 강조하는 것은 사랑으로 한 몸(하나)되는 이치에서 죽음의 저주 아래 놓인 인생들 구원이 목적이기 때문이며, 한 몸되는 체제에서는 한 지체가 고통 당하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 당한다는 지극히 평범한 상식 수준의 3위1체의 원리를 따른 것입니다. 그리고 이 한 몸으로서의 하나됨은 가장 행복한 이상적인 삶을 누리는 유일무이의 방법인 것입니다. 처음부터 인간(아담)이 자연계 육체로 지내다가 범죄하였다면 절대로 이런 고난받음을 강조할 리가 없습니다.

죽음과 고난이라는 것을 모르는 초자연계 몸으로 살다가 범죄함으로 이런 죽음에 사로잡혀 있는 결과로 인해서 그 저주로 이런 지경이 되어 있기 때문에 그 죽은 사람 살리고자 하는 이의 편에서 그 상대의 죽음에 같이 함으로써 하나가 되지 않고는 그 죽은 자를 살릴 수 없다는 마지막 아담의 본을 따름입니다. 그래서 이 죽음의 고난 받음을 적 그리스도가 모방할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것은 범죄함으로써 인간이 이 자연계 존재가 되어 있음을 부인하는 것인즉 적 그리스도의 정체가 스스로 드러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사랑으로 하나됨에서 오는 필연적으로 함께 하는 고난인 것입니다. 3위1체의 원리에서도 맞는 것이니 양면이 대칭성을 띤다는 점에서 영원 세계와 대칭되는 이 세계가 고난의 질서 아래 있다는 것은 이의가 있을 수 없다는 얘기입니다. 이 세상이 만일 고난이 없는 세계로서 살 만한 곳이라면 오는 영원 세계는 시종일관 고난이라야 한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이 육체적으로 삶과 죽음이 갈라져 있는 것처럼 오는 세상도 생명과 죽음(멸망)으로 가름되어져 나타나는 것은 물론입니다. 그러므로 대칭성이라는 것은 사면팔방으로 좌우 상하로 갈라져 나타납니다. "불의를 좋아하는"(살후 2:12) 자가 적 그리스도를 따름으로써 심판을 자초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같은 "진리를 사랑하지 않음"(:10)의 근본 원인이 자아중심의 이 함께 나누는 사랑의 고난을 기피, 외면하는 데에 있습니다. 고난만 끼어들지 않으면야 기피할 이유가 없습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구원 받기 위한 고난'이 아니라 '사랑의 고난' 즉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에 지진해서 받는 고통, 주인 의식으로서의 고난 받음입니다. 당당한 대의명분(大義名分)으로서의 보람찬 일임이 아주 뚜렷하게 드러납니다. 고로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은, 삶의 이치가 사랑에 있고 사랑은 하나됨에 있어 달든지 쓰든지 모두 함께 함인데, 단 것만 욕심 내고 쓴 것은 뱉는 자아중심이기 때문에 함께 고난 받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데 있습니다.

그래서 마지못해 순종하는 척하다가 귀에 쏙 들어오는 바 그런 자아중심을 따지며 가리지 않고 즉 고난받음을 요구함이 없이 영생으로 즉각 인도한다니까 적 그리스도에게 빨려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기쁨으로 하나님을 섬기지 않을 때 이는 자아중심으로서 단지 영생만 욕심낸다는 것이 드러나는 것인즉 구원이 결코 될 수 없고 멸먕만 자기 몫으로 태이는 것이니 스스로 "믿음에 있는가 자기를 시험해보며"(고후 13:5) 항상 성찰할 일입니다.

언제나 유의할 것은, 이 '둘의 하나됨'은 일방적인 것이 아닌 쌍방 교류(교제, "사귐"-요일 1:3,6,7)의 양면성과 동시성의 구조라는 것입니다. 갑의 생명은 을에게 와 있고 을의 생명은  갑에게 가 있는 그런 체제입니다. 이것을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께서 실천해 보이신 것이니 곧 자신의 생명, 자신의 전부를 나('머리'에 대한 '몸')에게 선물로 안겨 주셨으므로 나도 그 본을 따라 나의 생명, 나의 전부를 다 그리스도께 드리는 것ㅡ이것이 영원한 생명의 골격입니다.

그리고 인과, 주종 관계임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종 관계라 함은 큰 자(머리)는 작은 자(몸)가 반드시 따라 하도록 본을 보인다는 것이고, 때문에 이는 다시 인과 관계로 직결되는 바, 큰 자 곧 머리가 보인 본이 '원인'이 되어 작은 자 곧 그 몸이 이를 본받아 따름의 '결과'를 낳게 마련이요, 또 이 작은 자의 머리의 본을 따름이 '원인'이 되어 작은 자를 위함이라는 '결과'를 큰 자가 다시 낳는다는 이치가 '양면성의 동시성'입니다. 



"내 양을 먹이라"

"바요나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요 21:15)ㅡ"내가 너희에게 말한 것이 모든 사람에게 말하는 것"(마 13:37)이라 하신 대로, 이상과 같이 "바요나 시몬"이라는 이름에다 내 이름을 대입시키면 됩니다. 오늘날은 과거의 사도들의 모든 교훈이 성경으로 잔달되어져 있으므로 그 어떤 사람도 사도직(職)을 갖지 못하는 대신 모든 사람이 모든 사람에게 목자(牧者)이고 동시에 양 떼(양 무리, flock)가 됩니다.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요 21:16)는 명령은 모두에게 해당됩되는 명령입니다. 

<기도>로써 그렇게 할 일입니다. <말씀>으로 하는 것은, 먼저 믿어 그리스도 안에 있어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이 자기의 전도를 받고 처음으로 믿음에 들어온 이들을 상대로 할 것이나, 앞에서 지적한 대로 성경을 각자가 입수할 수 있고 살아 계신 하나님이 그 교과서의 저자(著者, author)이시니, 각자가 성경을 읽으며 성령의 친히 가르쳐 주심을 사모할 일이고, 그 중에서 선택된 목자(牧者)는 그러한 삶의 본(보기)으로서 자신의 겪은 과정에서 얻은 비결(know-how)을 일일이 때마다 전달해주는 것이 "말씀을 가르침"이 됩니다. 

고로 말씀으로써 남에게 가르치는 것은 상대가 처음으로 믿어 성경(말씀)에 대해 전연 백지 상태에 있을 때의 경우이고 어느 정도 기본 지식(구원 얻는데 필요한 "지식"은 워낙 간단 명료하니까)이 있을 때는 본인(당자) 스스로가 성령의 인도를 사모하여 친히 말씀 가르쳐 주심을 받기 위해 성경을 부지런히 읽음으로써 "구하고(기도하고) 찾고 두드리는(성경 읽는)" 것이 절대로 필요합니다. 스스로 그렇게 하지 않고 남의 덕에 배우겠다는 마음에는 절대로 진리의 문은 "열려지지"(마 7:8) 않습니다. 이렇게 성령께 배운 것을 "교회로서 모일 때"(고전 11:18-"as a church") 서로가 서로를 가르칠 수 있게 됩니다. 

특정한 날 특정 시간에 모이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초대 교회가 한 대로(행 2:46/히 3:12,13/10:24-31) <날마다> 믿음의 형제들끼리 그와 같이 모여 상호간 가르치며 합심 기도에 힘쓸 일입니다. 주인 의식으로 자발적으로 움직여야 하는 것은, 천국은 "침입하여 빼앗아 차지하는"(마 11:12/눅 16:16)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핵심이므로 사랑은 항상 적극 능동적으로 나가는 주인 의식이 특징이라는 그 뜻입니다.

사람이시지만 초자연계 몸이 되시어 하늘에도 계실 수 있는 마지막 아담께서 현재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고 장차 나타나시기로 되어 있지만, 사람이신 동시에 하나님으로서 성령으로 또한 우리 각자와 함께 사시고 일하고 계심으로써, 그 몸된 교회의 주인이시고 그 실질적인 운영자, 관리자, 각지 각 교회의 설립자이시니, 성령께로부터 난 것이라는 확신이 없는 한 그 어떤 인위적인 것에도 피동적으로 맹종하지 말고, 오직 우리의 인도자, 동역자(함께 일하는 이)로서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각자가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자세로 직접 그 명령을 받들어 주체 의식으로 매사 임해야 하는 때입니다. 


오늘날의 소위 "종교 개혁"은 과거처럼 <일개인>에 의해 주도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각 개인>으로부터 시작하여 각자가 그 원동력이 됨으로써 온 누리에 확산되어 나가는 때입니다. 이런 것이 결코 중구난방일 수 없는 것은, 한 성령 안에 있으므로 그 인도하심이 제각각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자연스럽게 하나로서 일사불란하게 기능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물론 기계적으로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고 사랑의 자유의지로 정착되기까지 우여곡절을 통과하게 되어 있어 인내가 필요하다는 것은 당연합니다.



2016년 6월 21일 화요일

3운법칙으로 검증되는 3위1체 법칙은 '21세기의 성경 해석'





21세기 이전에는 3위1체의 원리나 3운법칙이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계시(revelation)된 말씀이 인간 각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인 것처럼 3운법칙과 3위1체의 원리 역시 모든 사람(이를 수용하는) 개개인의 것(所有)으로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고전 3:21-23). 계시된 말씀을 그렇게 계시된 대로 수용하면 각자 자기 것이 됩니다. 아무개의 성경 해석이라 하지도 않고 그 아무개의 공로로 인정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 친히 나타내신 것이고 그 아무개는 단지 그 생명수를 공급하는 파이프(pipeline)였을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아무개'의 3위1체의 원리 또는 3운법칙"이 될 수 없습니다. 

세상에서 칭송 받는 또는 받게 될 '유명인'을 선정하지 않으시고 여러분이 익히 아시는 대로 일개 '무명인'을 통해 이 3위1체의 원리나 3운법칙을 알게 하신 것이 이 때문입니다. 자연법칙의 발견도 그 발견자의 이름을 나타내지만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고 성경도 모르는 이 세상의 관례일 뿐입니다. 이 경우 대개 그 '아무개' 개인에게 비중이 두어지고 영광이 돌아갑니다. 따라서 그 개인에 대해 상세하게 보도하게 되고 무지한 인생들은 그 지식이 하나님에게서 난 줄은 알지 못하고 그 인간만을 높이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무릇 어떤 형태이든 자아중심을 미워하십니다. 죄와 악의 근본으로서 '머리'이신 하나님을 인정 않기 때문에 '몸'의 각 지체가 제각기 제멋대로 놀아나는 혼돈으로서 모든 불화, 압력, 쟁투, 살인의 시발점이 됨입니다. 헤롯왕이 날을 택하여 왕복을 입고 위에 앉아 백성 앞에서 연설할 때 백성들이 크게 외치기를 "이것은 신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는 아니라" 할 때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않는 고로 주의 사자(使者)가 곧 치니 충(蟲)이 먹어 죽었다(행 12:20-23) 함과 같습니다. 이런 것이 죄와 악의 근본입니다. 

사람이 바치는 영광을 제 것인 양 여기고 하나님을 위하지 않고 모든 영광을 돌리지 않는 이것이 인간이나 영물들에게는 허물이 됩니다. 갑과 을의 하나됨에서 갑은 을을, 을은 갑을 위하게 되어 있지 자기를 위하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상대만을 위함으로써 자기가 무한대로 위해지는 삶의 이치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영광을 위해 만물을 창조하셨다는 말씀은(사 43:7) 창조물의 영광은 창조자 자신께서 되어 주신다는 그 뜻입니다.

3위1체의 원리나 3운법칙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이라면 별 문제가 아니지만, 참으로 하나님께서 이 마지막 때 나타내신 것이고 성경을 이해하는 데에 그리고 악령의 모든 거짓과 속임수를 격퇴함에 필요불가결한 것으로 주신 것이라면, 이 소중한 것을 다룸에 있어 다윗 당시 웃사처럼 망령된 일이라도 있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것입니다(삼하 6:6-8). 웃사는 소들이 날뛸 때 하나님의 법궤를 보호하려는 목적으로 법궤에 손을 대어 붙들었으나 법궤를 절대로 만져서는 안된다는 규정을 마음에 두지 않고 자기 소견대로 마음 내키는 대로 했기 때문에 현장에서 즉사한 것입니다. 

3위1체의 원리나 3운법칙이 필자가 인식하기로는 헝클어진 실타래처럼 얼키고섥혀 종잡을 수 없을 정도의 현재의 난맥상을 제대로 풀어갈 수 있는 열쇠를 제공한다는 의미에서 큰 역할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으므로, 하나님 친히 여러분 개개인에게 주신 선물로 인정, 최대한으로 활용하실 필요가 있습니다. 각자 스스로가 그 발견자인 것이니(계시된 것을 수용하는 것이 곧 '발견'인 것), 필자도 그런  발견자 중의 하나입니다. 

3위1체의 원리를 검증하는 것은 3운법칙으로서, 이는 초등학교 저학년이라도 확인할 수 있을 정도의 셈법인 만큼 너무나 간단명료합니다. 모든 사람이 직접 확증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특별한 예비 지식이 필요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지금까지의 자연과학의 법칙처럼 해당 분야에 해박한 지식이 있어 특별히 연구한 사람에 한해서 취급될 수 있는 그런 것이라면 3위1체의 원리, 3운법칙 등은 아예 세상에 나오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날의 이런 형편을 예견하시고 미리 준비하신 것이라 판단됩니다.

지금까지 필자의 신상을 밝힘에 대해서는 무관심으로 일관해 왔고 앞으로도 계속 그러할 것임이 결코 부적절하지 않다고 결론 내리는 것은, 만일 밝히게 될 경우 부각되는 것은 일개인에 관한 것으로 한정되어버리고 그 개인 여하에 따라 3위1체의 원리나 3운법칙도 논단될  수 있게 되는 것이니 이는 용납될 수 없는 일입니다. 필자가 성경을 남달리 많이 탐독했다는 그 차이로써만 세상에 발표할 수 있게 되었을 뿐입니다. 성경대로 두드리고 구하고 찾은 결과로 이런 새로운 지식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인데 이는 평범한 일로서 누구나 가능한 일입니다. 

누구든지 구하는 자에게 주시는 것은 하나님이시고 우리 중 그 어느 누구도 그 영광을 헤롯왕처럼 가로챌 위치는 절대로 아닙니다.  3위1체의 원리와 3운법칙은 성경에서 나온 것이니까 일종의 성경 "풀이"(벧후 3:16)와 같은 것이어서, 필자가 성경을 "강론"(행 17:2)하면서 오늘날 일반적으로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이 이것은 틀렸고 저것은 어떻다 하는 것과 하나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성경에 스며져 있는 진리를 해석하여 알리는 그런 정도입니다. 필자의 해석을 수용할 것을 그 누구도 강요하지는 않으니까(사랑을 강조하는 성경이므로 성경은 무엇이든 강제, 강요하는 것이 없으니, 강요하는 순간 그것은 진리가 아닙니다ㅡ하나님의 계명은 강요가 아니라 "사랑하면" 마땅히 지키게 되어 있다는 안내요 지침일 따름입니다-요 14:15,23), 그것을 수용하고 않고는 독자의 완전 자유입니다. 

성경에서 3위1체의 원리와 3운법칙을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뿐입니다. 필자의 각종 성경 해석을 수용하지 않으면 그뿐임과 같이 이 사실 역시 수용하지 않으면 그만입니다. 다만 이 3위1체의 법칙은 창조의 법칙이고 만유 존속의 원리이므로 자연법칙에도 당연히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아인슈타인은 보어와의 논쟁에서 '틀렸고' 그렇다고 보어의 주장이 완전 무결하다는 것은 아니니 만물의 상보성은 알았으나 그 상대되는 양자(兩者) 관계가 인과, 주종, 대소, 선후(먼저 존재함과 나중 존재함)로 가름되어짐을 몰라 창조자의 존재를 인지하지 못했으므로 '보어는 몰랐다'"고 하는 주제를 단 것입니다. 

성경 풀이에서 갖가지 억지 해석이 많은 중에(벧후 3:16) 어느 누구든 제대로 된 해석을 내놓으면서 이것은 "내가 해석한 것"이라고 내세우고 광고하는 사람은 없는 것처럼 3위1체의 원리와 3운법칙도 똑같습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성경의 여러 사실 중 하나를 밝혀 드러낸 것에 불과합니다.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다"(마 11:27)고 말씀하신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계시하여 주심으로써 우리가 하나님과 그 구원에 대해 비로소 알게 되는 것이고 그렇지 않고는 일절 알 수 없음과 같이 3위1체의 법칙도 꼭 그대로입니다.

하나님이 계시하여 주심으로써 지금까지 인식 못하던 것을 이제는 여러분이나 필자나 알게 되었다는 것뿐입니다. "계시"라는 말에 특별한 무게를 둘 필요는 없습니다. 사람이 지금까지 알고 있는 것 중 계시 아닌 것 즉 하나님께서 가르치시고 보이시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파종하려고 가는 자가 어찌 끊이지 않고 갈기만 하겠느냐 그 땅을 개간하며 고르게만 하겠느냐 지면을 이미 평평히 하였으면 소회향을 뿌리며 대회향을 뿌리며 소맥을 줄줄이 심으며 대맥을 정한 곳에 심으며 귀리를 그 가에 심지 않겠느냐 이는 그의 하나님이 그에게 적당한 방법으로 보이셔서 가르치셨음이며 소회향은 도리깨로 떨지 아니하며 대회향에는 수레 바퀴를 굴리지 아니하고 소회향은 작대기로 떨고 대회향은 막대기로 떨며 곡식은 부수는가, 아니라 늘 떨기만 하지 아니하고 그것에 수레 바퀴를 굴리고 그것을 말굽으로 밟게 할지라도 부수지는 아니하는 것이니 이도 만군의 여호와께로서 난 것이라 그의 모략은 기묘하며 지혜는 광대하시다"(사 28:24,29) 이는 하나님이 전적으로 그 지으신 피조물을 위하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영물(靈物)들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인생들에게 나타내는 것입니다. 

성경이 "생명은 피에 있다"는 언급을 했지만 이 자연계 법칙도 진실임이 확증된 것은 현대에 와서였습니다. 이렇게 자연과학적으로 진실임이 입증되기까지는 아무도 이것이 사실인지 여부를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다만 3위1체 법칙은 자연계와 초자연계를 망라하는 것이므로 자연과학적 실험으로는 검증되지 못한다는 차이는 있습니다. 그 대신 3운법칙이 검증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어느 누구든지 성경을 바로 해석하여 이를 가르치게 되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가르치시는 것으로 알지, "아무개의 가르침"이라고 부질없이 토를 달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와 같이 성경이 밝히고 있는 사실 중의 하나가 바로 3위1체의 원리요 3운법칙입니다. 모든 자연과학 법칙이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지만 가령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나 뉴턴의 만유인력의 법칙이 성경에서 나왔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3위1체 원리나 3운법칙은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노아의 생애와 모세 및 아브라함의 생애를 근거로 3운법칙이 발견되었고, 예수님께서 아버지(하나님)께 대해 여러 차례 설명하신 사실에서 3위1체의 원리의 골격이 나타나졌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아버지와 아들께서 둘이 하나로 계시는 모습을 따라 만물을 지으셨음을 증명하는 것이 3위1체의 원리입니다. 상대성 이론 등은 자연법칙의 하나로서 인정되는 것이지만 3위1체의 원리는 초자연계의 존재까지 입증하고 있는 만유의 법칙으로서 성경에서 나왔다는 데에 그 의의가 어디다 비할 데 없이 막중합니다. 

유명 자연과학자(이제부터는 '과학'이라면 "자연과학"이라고 한정해서 부를 수밖에 없는 것은 초자연계가 대칭적으로 존재함이 확인되었기 때문)들 중의 하나가 이 3위1체의 원리와  3운법칙을 발견했다면 좋았을 것이 아니냐 할지 모르나, 앞에서 이미 설명한 대로 그다지 큰 의미가 부여될 수는 없습니다. 자기 전공 분야와 영역에 따라 총체적인 인식이 자연계에만 한정되어 있는 자연과학자는 이와 대칭이 되어 있는 초자연계를 인정하려 들지 않기 때문에라도 그렇습니다.

또 하나는 성경의 모든 대목을 문자 그대로 진실임을 확신하는 것이 필수 전제 조건인데 그 정도라면 성경 자체에 매료되어 자연과학자가 되지 않고 기독교 교역자나 성경 학자가 되어 있을 것이기에 그러합니다. 그러나 지금부터는 자연과학자라면 의당히 3위1체 원리와 이를 검증하는 3운법칙을 토대로 모든 연구를 누구나 진행하지 않으면 안되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전에는 무지했었으나 이제는 실상을 알게 되어, 몰랐던 당시에 비하면 완벽한 지식을 얻게 되었다고 해서 그것이 우리를 안전 지대로 올려놓는 것은 또한 아님을 마음에 아로새겨 둘 필요가 있습니다. 지식이 전부가 아닌 것이니, 오직 지식은 "돌이켜 어린 아이 같이 되는"(마 18:3) 토대를 구축하는 디딤돌 역할일 뿐입니다. 이런 "지식"이  없이도 어린 아이 같이 되어 하나님을 사랑하여 순종하게 되면(고전 8:3) 이 경우 당당히(그러나 은혜로) 천국에 들어가게 됩니다. 왜나면 아버지의 뜻을 사랑으로 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마 7:21).


초대교회가 향유했던 기본 지식을 비록 상실했지만 지금까지도 구원 받음에는 아무 하자가 없었음이 이 때문입니다. 사람이 구원 얻는 근본이 되는 지식은 아주 간명하게도 사랑에 있기에 그러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시어 십자가 죽음을 당해주시기까지 나를 사랑하셨으므로 나도 의당히 그와 같이 하나님을 사랑함이 옳다는 내 양심의 소리에 끝까지 충실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삶을 영위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천국을 위해 독신으로 지내라"는 격려 말이 들리지 않는 교회는 사경을 헤매는 중환자실에 갇혀 있어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

이와 같이 성경에 대하여 무지한 교회가 가르치는 것이 로마서 7장을 그리스도 안에서의 각자의 체험이라고 하는 황당함입니다.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고린도전서 7장에 대해서는 함구합니다. 거꾸로 가는 것입니다. 남자든 여자든 독신으로 지내는 것을 가리켜 "동정(童貞, virginity)을 지킨다"고 말하는데, (우리말 번역도 그렇지만) 부모가 자기 "딸"(또는 "처녀")을 결혼시키지도 않을 수 있다는 해괴한 내용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고전 7:38). 세상에 이런 일도 다 있다니! 불신자들이 얼마나 이상한 눈초리로 보겠습니까! 성경을 무슨 사이비 종교쯤으로 여기지 않는다면 어찌 이런 번역이 가능합니까.

이런 당치도 않는 성경 해석은, 오늘날 그 어떤 교회에서든 바울이 경고한 대로 혼자 지내는 것을 권면하지 않는 것과도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바 "천국을 위하여 고자가 되는 것"(마 19:12)을 일절 말하지 않는 "교회"입니다. "천국을 위하여!"ㅡ얼마나 좋은 뜻입니까. 주님께서도 "받을 만한 자는 받으라"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소위 "기독교" 교회는 이런 시의적절한 요긴한 말씀을 완전히 아주 깡그리 무시해 왔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오늘날쯤 되어서는 믿는 사람으로서 독신이 되어 있어 오직 하나님의 사업에만 골몰하고 있는 이들을 어디서나 만날 수 있게 되었을 것입니다. 

천주교에서 교역자가 평생 독신으로 지내는 것은 "교회"(그들 나름의) 사목 일을 보려면 누구나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이므로 강제 규정입니다. 이것은 억지이고 따라서 성경에 위배됩니다. 로마 카톨릭이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니라는 것은 마리아를 빼놓고서는 그들의 교리를 말할 수 없다는 사실에서 이미 확증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거론할 필요가 없지만 혹 그런 예를 들지나 않을까 해서 지적하는 것입니다.

소위 "교회"가 이런 문제에 대해 완전 침묵하고 있다는 것은 앞서 언급한 대로의 로마서 7장과 결코 무관하지 않습니다. 바울 사도의 고린도전서 7장의 내용은 위의 주님의 말씀을 상기시키고 강조하고 있는 바로서 로마서 7장과 반대가 됩니다. 후자는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에서 살고자 하기 때문인데 전자는 그와 정반대입니다. 사람은 짝을 이루어 살지 않으면 고독한 생활을 하는데 그런 데에서 삶의 낙을 누릴 수 없다는 것이 일반적 인식입니다.

혼자 지내는 것만 아니라, 종으로 있을 때 믿음에 들어왔으면
  그 후 자유인이 될 수 있어도 차라리 그 종의 신분으로 있는 것을 이용하라 했으니 더 무슨 말을 할 것입니까. 세상 물건을 샀으면 그 물건을 소유하지 않은 것과 같이 하고 세상 물건을 다 쓰지 못하는 것과 같이 하라 했고, 뿐만 아닙니다. 아내 있는 자, 남편 있는 자는 없는 것 같이 하라 했으니 더 이상 언급할 필요가 없습니다. 바울 사도가 말한 바, "이 세상은 지나가고" 다시 돌아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는 것을 철저히 배격한 것입니다.

이런 경고 그리고 명백한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에서 살고자 하기 때문에 로마서 7장을 난데없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체험에다 갖다 붙이게 됩니다. 로마서 7장은 전후 문맥만을 살펴보아도 그리스도께 나오기 위한 전단계 과정임을 쉽사리 알 수 있는 내용입니다. 자기의 회개하지 않은 상태에다 아전인수 격으로 억지로 합리화시키려 하니까 이런 결과가 됩니다. 이런 간단한 예만 보아도 오늘날까지의 소위 "교회"가 어떤 상태에 놓여 있는지 알기에 충분합니다.

이렇게 세상을 사랑하지 않으면, 자연적으로, "주님을 어떻게 하면 기쁘시게 해 드릴까"(고전 7: 32) 하는 여기에만 삶의 초점이 맞추어지게 됩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바로 그 뜻을 행함이니 그 뜻이 무엇인가. 사람들을 구원함에 있습니다. 이를 위해 일심으로 기도에 힘쓰고 말씀 전달하기에 힘쓰고 거기에 따른 핍박이 있으면 그것을 감수하고, 또한 삶의 본을 보여 "일하기 싫어하는 자는 먹지 않는다"(살후 3:10)는 원칙을 지키되 그 목적이 세상 사람들처럼 잘 살고자 함이 아니라 "가난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해"(엡 4:28) 하는 것ㅡ이런 단순한 삶의 무한 동력(無限動力)입니다. 단순하되 사랑이 그 원동력이므로 활화산처럼 용솟음치는 지칠 줄 모르는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오름과 같은(사 40:31) 그런 역동적 삶입니다.

사랑이 그런 힘("성령이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행 1:8)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최대로 행할 수 있는 선행은 그로 하여금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즉 악에서 돌이켜 "선을 행하게"(롬 2:7-10) 하는 다시 말해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다시 출생하게 하고 새로 창조를 받도록 하는 일입니다. 다른 모든 선행은 이 차원에서 행해집니다(고전 10:33). 이런 적극성, 능동성, 주체성이 없다는 것은 남에게 봉사할 줄은 모르고 자아중심의 영생만 탐내는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이런 사람을 구원하신다면 모든 인생들을 다 구원하시지 나만 구원하실 리 없다는 것을 마음에 깊이 각인해 두어야 합니다.   

이런 내용에 대해
 만일 지금 마음 한 켠에 부정적인 생각을 품는다면 구원(영생)은 아예 꿈꾸지도 말아야 합니다. 내 자신 죽음에서 생명 가운데로 다급하게 구출되었으면 다른 사람도 구출되도록 힘쓰는 것이 당연하고 정상이지,  나 혼자 구원된 것으로만 만족하고 나는 구원되었으니 편안하게 이 세상 살고 가겠다는 그런 탐심(영생에 대한)의 자아중심은 하나님께서 결코 용인하시지 않습니다. 하실 수가 없습니다. 왜냐면 지금 시급하게 사람들 구원하는 것이 최우선시되어야 할 시기이고, 그렇지 않더라도 산 자가 되었으면 산 자로서의  특징이 바로 머리의 지시를 받들어 온 몸에 기여하는 것이므로 역시 그러합니다. 산 자로서의 삶의 특성입니다. 

이런 특징이 없다면 그 자신 구원되지 않았다는 증거일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너를 구원하였으면 다른 이들도 너와 똑같이 소중하기에 구원되어야 마땅하거늘 너는 어찌하여 '나의 마음'을 모르고 이 시급한 '나의 일'에 함께 하지 않느냐" ㅡ이 하나님의 뜻은, 복음(구원의 희소식) 전파가 이 세상에서 완료되면 지체 없이 "세상이 끝난다"(마 24:14)고 하신 말씀에서 충분히 확인되고도 남습니다. 삶(생활)을 단순화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집중력이 생기고 힘이 분산되지 않습니다. 이런 단순화, 간결화는 어린 아이 같은 믿음이 초석이요 반석인데 이 토대는 3운법칙과 3위1체의 원리로 힘입는 바 크다고 해도 과히 틀리지는 않습니다. 

"이렇게 열심히 사랑하다가(살다가) 가리라, 하나님 부르시면 나의 영원한 안식(安息, 쉼)에 들어가리라(히 4:11,10,5,3,1/3:18,11/시 95:11)"는 자세로 시종일관하는 것입니다. 치사하게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고 깨끗하게 남을 위한 삶ㅡ이 세상만이 줄 수 있는 여한이 없는 생의 의미일 것입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힘이)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실 것이니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 것은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임이다"[약 1:5-8].

성경에 관한 한 모든 것을 다 안다는 자만에서 벗어날 일입니다. 모든 지식은 성령의 가르치심(계시)에서 오는 것인즉 우리 스스로 "다 안다"고 하는 것은 진정 알아야 하는 것을 아직 모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고전 8:2). 항상 성경을 열어놓고 수시로 기도하며 성령의 인도를 간절히 앙망해야 마땅합니다. 아무리 전체적인 지식이 있다고 해도 그 날 그 시간의 필요한 영적 양식은 하나님 친히 주시지 않고는 알 수가 없게 되어 있습니다. 나는 혼자 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것입니다(고후 6:1). 

깊음은 얕음을 동시에 떠올리지 않고는 제대로 이해가 안되듯이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사실과 하나님은 무서운 "소멸하는 불"이시라는 사실을 함께 염두에 두고 뇌리에 각인시켜야 합니다. 이것이 3위1체 원리의 양면성의 동시성, 동시성의 양면성입니다. 나를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새로이 창조해주심과 동시에 내 스스로 나의 거룩함을 이루지 않으면 안되는 양면의 조화가 반드시 필요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때문에 내가 구원을 받았지만 내 스스로 구원을 이루어야 하는 것입니다(빌 2:12). 

지금부터 모든 교회는 이 성경의 경고를 그대로 수용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을 제대로 가르쳐야 합니다. 많은 사람을 본의 아니게 속여 온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필자의 성경 해석이 옳다는 것을 확증해 주는 것이 3위1체의 원리요 3운법칙입니다. 사도들이 생존하던 초대교회 당시에는 각종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심으로써 자기 은혜의 말씀에 대한 증거가 되게 하셨지만(행 14:3), 오늘날은 3위1체의 원리와 이를 훌륭히 검증하는 3운법칙으로써 당신의 말씀을 증언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지금은 '생존해 있는 사도'의 권위 대신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이 그 역할을 훌륭하게 대리 수행하고 있습니다.

인생이여, 그대의 뿌리를 아는 것이 가장 화급(火急)하다





2016년 6월 14일 화요일

"완전주의"를 표방함이 아니라 "사랑"을 강조하는 것



혹자는 완전주의자(perfectionist)라 비방할지 모르나, 그런 사람들에게 되묻고 싶은 것은, "사랑에 완전주의 혹은 불완전주의가 있는가? 그런 것을 따지는가?" 하는 것이다. "사랑"을 말한 것이지 "완전한지" 여부를 말한 적이 없다. 사랑에는 물론 차이가 있다. 모두가 다 똑같지는 않다. 그래서 30배, 60배, 100배 열매의 차이가 있음을 시인하셨다. 이런 것은 순수히 개인 문제다. 그런 것까지 간섭하지는 않는다. 오직 사랑하라, 자기를 위하지 말라는 기본만을 성경이 가르치며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열매를 맺고도 그 모든 열매를 무위로 돌릴 수도 있다. 능력으로 귀신까지 쫓아낸 사람이 영원 멸망에 들어갈 수 있다 하셨으니(마 7:21) 우리가 무슨 말을 더 하겠는가. 왜냐면 사랑은 언제나 현재를 말함이니 과거나 미래를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어떤 위치에 있는가, 내 마음이 어디로 향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 항상 중요하다. 사랑은 자유인만의 특전이요 특권이다. 자유인은 그 어느 누구에게도 종속, 예속되어 있지 않다. 하나님께도 예속되어 있지 않음은 물론이다. 


이것이 자유 의지를 주신 이유다. 우리 스스로 하나님을 사랑하여 받들어 모심이지 억지로 하는 것을 하나님은 미워하신다. 사랑이 아닌 자아중심의 발로이기 때문. 여로보암 왕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려고 유다에서 벧엘로 온 선지자가 돌아가는 길에 사자에게 찢겨 죽은 것이 그 때문이다(왕상 13:1-33). 우리 스스로 단 마음으로 기꺼이 하나님의 일을 아니할 때 그 일은 내게 아무 실효도 가치도 없다는 것을 깊이 명심할 일이다. 


우리를 죽은 자로부터 산 자로 구원하신 것은 더 이상 그 무엇에도 굴종하지 말고 그래서 피동적으로 소극적으로 살지 말고 당당한 주인 의식으로 적극, 능동적으로 매사 임하여 내가 스스로 좋아해서 하고 싫어하기 때문에 아니하는 것이 자유인의 삶인즉 그렇게 살라 하심이다. 환락도 자기 싫으면 아니하는 것이고 고난 고통도 자기가 원하고 필요한 것이면 기꺼이 감수하는 것이다. 자아중심은 사랑일 수 없다. 그 반대인 자기 부인은 자기를 위하지 않고 사랑의 상대방을 위함이니 즉 둘이 하나되어 있는 그 상대를 생각하고 그 뜻을 위하는 것. 자아중심이 아닌 그리스도 중심. 그리고 머리의 지시를 받들어 한 몸된 이웃 중심의 삶이다.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들로 구원을 얻게 하라"[고전 10:33] 함과 같다.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가지만이라도 족하다"(눅 10:41,42) 하신 대로 생활을 단순화할 필요가 있다. 생활이라기보다 사고방식을 단순화하는 것이다. 어린 아이 같은(마 18:3) 단순성, 간결성 이런 데에 능력(power)이 있음을 재삼 강조하는 것이다. 거짓이 많고 속임수가 횡행하는 때일수록 이는 필수적인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만세반석 위에 세워진 <작은> 소나무



큰 소나무가 되려 할 필요는 없다. 되려 해서도 안된다.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낮추는 자는 하나님이 높이신다. 아무리 작은 소나무일지라도 그 소나무만 보지 않고 소나무를 버티어주는 큰 바위와 반드시 함께 보아주는 법이다. 소나무가 크면 소나무만 보겠지만. 따라서 아무리 약하고 보잘 것 없는 사람도 위축될 필요가 없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과 함께 일하면(벧전 1:12/고후 6:1) 능히 세계를 정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바울 사도가 복음(福音, 구원의 희소식)으로 세계를 정복했다는 말을 할 수 있다면. 하나님 친히 일하시기 때문이요 하나님 친히 하나님의 일을 하시는 것이지 내가 나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님이다. 하나님 친히 하시는 일을 누가 막으리요. 그래서 "이보다 더 큰 일을 하리라"고 우리들 모두에게  약속하셨다.

피 끓는 젊은 소나무들을 부르신다. 카나다 피플즈 처치(the People's Church)의 오스왈드 스미스(Oswald Smith)가 사도 이후의 최대 복음 전도자라 했던 찰즈 피니(Charles Finney)도 양양한 변호사 수업을 박차버리고 29세에 복음 전도의 길에 나섰다. 중국의 송상절(Dr. John Sung) 화학(化學) 박사도 양양한 대학교수로서의 안일한 생활을 미련없이 내던져버리고 26세에 중국과 동남아시아 각곳을 다니는 복음 전파의 하나님 사업에 돌입했었다. 그가 전한 내용의 복음에 대해 자세한 것은 모르지만. 이 말을 하는 것은 같은 무렵의 웟치만 니(倪柝声, 니퉈셩, Watchman Nee)가 저술한 "the Normal Chrostian Life"의 내용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정확하게 전달한 것이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도 번역되어 있지만 결코 권장할 만한 책이 아니다. 그러나 이들의 열심만은 우리 모두가 본받을 만한 것이다. 


필자는 고교생, 대학생 정도의 연령층에 속하는 젊은이들이 이런 사이트를 찾아주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모름지기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자처하는 이들은 이생에서의 유일하게 할 일은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파에 있는 것이니, 사람들을 새로 창조하시고(고후 5:17) 다시 나게(요 3:5) 하시는 하나님의 일에 즉각 투입되어 하나님과 함께 이 새 창조의 일을 하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하게 되어 있는 본분이다. 학교 교사를 하든 의사를 하든 공무원이든 자기가 있는 위치에서 부르심을 받은 대로 "그리스도의 증인"(행 1:8)으로서의 임무를 다함이다. 종으로서 있을 때 부르심을 받은 경우 자유인이 될 기회가 있어도 차라리 종으로 남아서 이 증인 역할을 하라는 것이 바울 사도의 가르침이다(고전 7:21). 왜냐면 우리가 이 세상 남아 있는 것이 삶의 낙을 누리기 위해 있고 살고자 함이라면 당연히 자유인이 되어야 하겠지만 그것이 아니고 사람들을 살려내는 데에 있는 것인즉 종의 신분에 놓인 이들에게 전도하는 것은 종으로 현재 위치해 있는 것보다 더 나은 조건이 없는 까닭이다.   






(2) <함께 사는 것>이 아닌 <구원과 관련해서만 인식하는 그리스도> 정도면 구원은 없다







1년 365일 24시간 나와 함께 사시는 "마지막 아담"(고전 15:45)이시다. '아담'의 의미가 원래 그러하다. 우리가 첫 사람 아담으로부터 육체를 물려받아 나의 육체가 바로 아담의 형상(형태)인 것이다. 이 '사람의 형태'를 떠나서 내가 어디로 가겠는가. 동물의 형태를 띠겠는가. 한평생 나는 아담의 육체와 더불어 일생을 살고 있는 셈이다. 이 세상에서만 아니라 영원히 그러하다. 내가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 아담을 지으신 것은 물론 하나님이시다. 이 하나님께서 친히 사람이 되셨으니 우리 위해 "마지막 아담"이 되시고자 함이다. '첫 사람' 아담이 있었고 이제는 '마지막 아담'이시다. '아담'의 의미 또는 성격이 똑같은 닮은꼴의 생산에 있다. 첫 사람 아담의 육체가 우리 각자 개개인에게 물려져 모두 아담의 육체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처럼, 마지막 아담께서는 인간의 이 이중 구조 즉 '육체와 영혼'이라는 대칭성에서 '육체'(이는 첫 사람 아담의 몫)와 대립되는 '영혼'의 측면으로 첫 사람 아담처럼 그 몫을 하심이니 이는 당연하며 결코 이상한 일일 수가 없다.

처음부터 마지막 아담을 세우고자 하신 것이 아니라 첫 사람 아담이 범죄로써 죽은 자가 됨으로 인하여 그가(남녀 모두) 받은 저주와 더불어 그 아래 만물 역시 저주 아래 놓이게 되고 함께 고통 중에 들어가게 된 것이(롬 8:22) 오늘날까지 이르게 된 결과다. 때문에 이렇게 생명 아닌 죽음에 갇힌 인생들을 다시 처음 창조 때와 같은 산 자로서 새로이 만드시고자 함이다. 그래서 이렇게 된 인간과 더불어 만유를 애초의 창조 당시와 같은 정상 상태로 회복하시는 과정에 현재 있는 것이다. 

인간만 회복하면 되시지 왜 만물까지 덩달아 회복하셔야 하는가 하면, 인간이 만물의 머리로서 자기 아래 있는 만물과 '머리와 몸'의 체제로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한 몸 구조에서는 머리 따로 몸 따로가 없으므로 머리의 저주는 몸의 저주로 미치기 때문에 아담이 받은 저주는 땅에게까지 파급된 것(창 3:17). 고로 아담이 범죄하지만 않았더라면, 우리 위해 십자가의 죽으심을 당하시기까지 하는 "마지막 아담"이 되실 리가 만무하다.

사람이 되시지 않아도 피조물에게 임하시는 사랑은 어제나 한결같으신 것이니, 달라진 것이 있다면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 친히 사람이 되셨다는 사실에 국한된다. 인간이 비정상적인(범죄로 인해) 상태 곧 자연계적 존재가 됨을 인해 하나님이 보이시지 않는다는 등의 불편한 점과 기타 여러 여건이 부정적이어서 그렇지, 처음과 같은 초자연계 몸으로 있는 경우라면 하나님을 인지하는 데에 아무런 지장이 없는 것이었다(비록 보이시지는 않는다 해도-딤전 6:16). 아담이 에덴낙원에서 범죄한 것이 하나님이 가시적으로 나타나시지 않아서가 아닌 것이다.

얼마든지 하나님과 충분한 대화를 나누는 것이 초자연계 몸의 특징 중 하나다. 또한 이렇게 사람이 되신 것이, 볼 수 없는 하나님이시기에 가시적으로 우리 시야에 들어오시기 위해(인간이 현재 자연계에 속하여 비정상 상태에 있으므로) 일부러 사람이 되신 것도 물론 아니다. 하나님 앞에서 범죄자는 죽을 수밖에 없는 위치이므로 우리와 함께 죽으심으로써 하나가 되신 바탕을 토대로 나와 함께 살아나심을 인해 나를 죽은 자가 아닌 산 자가 되게 하려 하시는 것으로서, 인간 피조물에 대한 사랑, 오직 변함없이 이 하나 때문이신 것. 하나님의 아들께서 우리 개개인과 1년 365일 하루 24시간 함께 사신다고 해서 우리를 간섭하시거나 억지로 통제하시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전에 우리가 하나님 없이 하나님을 모른 채 혼자 능히 살 수 있는 듯이 살아 왔던 때와 조금도 다름이 없다. 그만큼 자연스러운 것이다. 바늘 끝만큼도 강제하시는 일이 없다. 우리만을 위하시고 우리의 뜻과 상관 없이 그 무엇이든 일절 하시지 않는다는 이 사실은, 우리가 여차하여 자아중심으로 흘러 급기야는 그리스도를 다시 십자가에 못박는(히 6:6ㅡ세상에 오심으로 십자가 죽으심도 내게 관한 한 나의 죄가 그렇게 하나님의 아들을 죽으시게 만든 것이었으므로) 판이 나더라도 그냥 그대로 잠자코 십자가에 못박히신다고(히 6:6) 함으로써 이 점을 성경은 분명히 설명하고 있다.

]이런 정도이시다. 즉 내 안에 성령으로 계시는 의미는, 자기를 위해서는 일절 아무 것도 하지 않으시고 오로지 나만을 위해 존재하심에 있다. 때문에 내가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는 순간 당장 내게 어떤 조처를 취하신다는 그 어떠한 표현도 성경은 하지 않았다. 단지 내가 그리스도를 그렇게 해서 "죽였으니" 내게 관한 한 그리스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그 뜻뿐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없는"(요일 5:12) 세상 사람 즉 일반 불신자와 같은 취급을 받는다는 것으로만 결론 내려진다.

그러면 내 안에 계실 때 나만 위하시니 일방적으로 즉 내가 주님을 위함이 없어도 나를 위하시는가 하면 그것은 절대로 그렇지 않다. 왜냐면 내가 성령을 받기 전 회개할 때 오로지 주님 위해서만 살겠노라고 결의하고 약속을 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나만을 위하시는데 나는 나만을 위했으니 이를 뉘우치고 나도 이제는 하나님만을 위하겠다는 의지 표명은 당연하다. 이런 것 없이 세례 받고 신앙 고백한다고 성령께서 절대로 임하시지 않는다. 임하실 수가 없는 것이다.

누차 지금까지 설명해오는 대로, 이 위하심은 내가 주님을 위함으로 비로소 표현화하고 구체화하는 것이니 이것이 3위1체의 원리를 따르는 사랑의 삶이다. 갑과 을이 동시에 양면성으로 움직여야 하는 것이니 이것이 사랑이다. 하나님의 일방적인 사랑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일방적인 사랑이 가능할진대, 범죄한 아담이나 불복종하는 영물(그래서 이들을 악령이라 하는 것)이나 이들을 모두 일방적으로 사랑하심으로써 죄의 대가를 얼마든지 면제해 주셨을 것이 아닌가.

그러나 죄는 죄대로 물으셨다. 왜냐면 그렇게 하지 않으면 법질서가 확립되지를 않는다. 법과 질서가 없으면 행복한 삶도 물론 없게 된다. 그냥 물에 물 탄 듯 얼렁뚱땅 넘어가는 것이 아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모두 가해자가 되어 고통의 천하가 되어버린다. 결국 하나님이 손을 대시지 않는다 하더라도 피조물 스스로가 공멸(共滅)을 초래하게 되어 있다. 하나님이 이런 사태를 수수방관하실 리 없다.

함께 사는 것이 악(惡, 나쁜 것)이고 선(善, 좋은 것)이 아니라면 사람이 왜 남녀로 짝을 지어 사는가. 그것이 피차간의 간섭과 강제로 그친다면 누가 결혼할 마음을 품겠는가. 자식 생산이 목적이라면 자식을 낳자마자 헤어질 것이 아닌가. 아담(남자)에게서 아담의 닮은꼴(여자)이 났기 때문에, 둘로 현재 되어 있지만 원래 아담 혼자(하나)였던 상태를 유지하려고, 다시 하나로 합치려고 그런 피차간의 욕구가 생기는 것이니 일종의 귀소본능이다.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어버이 사랑'도 만물이 창조자 하나님에게서 났기 때문이다. 천국에서는 남녀 성별이 사라짐과 동시에 그런 욕구도 없어진다. 그 대신 우리 각자가 그리스도(마지막 아담)와 하나되어 있으므로 즉 그리스도의 영을 모두 받아 모시고 있는 관계로 새로운(육체적이 아닌 영적인) "귀소본능"이 영구히 자리잡게 된다.

고로 남녀 한 몸으로 결합하여 함께 살아감에 아주 지장이 없는 것이며 오히려 함께 함이 없으면 살 맛이 나지 않는 것처럼 되어 있는 것이니 이것은 육체로 한 몸됨의 경우다(창 2:24). 성경은 우리 각자가 그리스도와 합하여 "한 영"(고전 6:17)임을 명백히 하고 있다. 아기가 엄마 품을 떠나서 살 수 없듯이 우리 각자는 마지막 아담의 성령을 떠나서는 살 수 없음이 그와 같다. 밥을 먹지 못하고 젖을 먹어야 하기에 그것부터가 그렇다. 생모가 없으면 젖어미의 젖을 먹든지 하다못해 소의 젖(우유)을 먹든지 그렇지 않고는 필연코 죽음이다. 그리스도와의 이런 관계를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 제7장에서도 명백히 해놓고 있다.

그리스도와의 하나됨 즉 "한 영"됨이 남편과 아내 사이의 "한 몸"됨보다 더 우선시되고 일차적인 것임을 명백히 한 것이다. 아내 남편이 함께 살면 마땅히 아내/남편을 어떻게 하면 기쁘게 해줄꼬 하는 마음이 우러나게 마련이다. 이것이 신혼 초기 또는 금슬 좋은 부부 사이다. 그런데 나와 주님과의 관계는 이보다 더 앞서는 것임을 바울은 밝힌 것이다. 아내/남편끼리의 관계도 사랑하는 사이라면 당연히 그러한데 하물며 나와 마지막 아담(사람)과의 관계야 일러 무삼하리요.

"마지막 아담"께서는 다시 강조하지만 사람이시다.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 아니시라면 "마지막 아담"이 되실 수가 없다. 특별한 사람이 아니시다. 왜 이 점을 강조하느냐 하면, 예수님께서 사람이시자 하나님이시라고 해서 우리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존재인 듯이 상상하고, 이 예수님과의 관계를 구원에만 한정시키고, 함께 사는 것을 마치 동화 속 이야기나 하는 듯이 이상하게 여기는 경향이 거의 전부데 해당되기 때문이다.

오직 구원을 얘기할 때에만 그리고 교회에 가서나 예수님을 들먹일 뿐 일상 생활에 함께 하시고 함께 일하시는데 대해서는 금시초문인 듯 벌레 씹는 듯한 시늉이 되고 있다. 진실대로 말하면 우리가 구원(영생) 한 가지만 욕심 낼 뿐 주님과 함께 일함으로써 주님을 위하는 일에는 너무 생소하게 지내왔다는 사실이 폭로되는 것이 아닌가. 우리가 주님과 하나되어 있다는 것 즉 구원 받았다(성령을 모시고 있다)는 것은 주님 친히 말씀하신 대로 즉 성령 받음의 의미를 밝히시면서 "아버지가 나를 보내신 것과 같이 나는 너희를 보낸다"(요 20:22,23) 하신 대로, 우리가 주님을 섬겨 주님을 위한다는 것을 의미함이다.

이것이 바로 둘이 하나됨의 삶 곧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함이다. 영원히 이러하다. 삶의 의미를 잘못 이해하며 살아 왔기 때문에 이 대목에 와서 의아해하는 것이다. 산다는 것은 머리와 몸의 체제에서 무조건 그리고 영원히 하나되어 있는 상대를 위해 사는 것이요 그의 삶을 살아주는 것이요, 그렇게 함으로써 나의 상대는 나의 삶을 살아주는 체제다. 내가 나를 위하는 여기에서 범죄가 형성되고 이것이 자아중심(selfishness)이며 아담이나 악령들이 이 때문에 범죄의 대가를 받은 것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이와 같이 살지 않았다는 것은 살 줄을 몰랐다는 의미밖에 더 되지 않는다. 그렇게 자아중심으로 살아도 살아지니까 '사는' 것으로 오해한 것뿐이다. 이제는 '살아지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것으로 살지 않으면 사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하는 것이니, 사랑은 항상 능동적으로 적극성을 띠며 주인 의식으로 사는 것을 말함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자기 부인의 의미이다. 구원을 받기 위해서만 그리스도만 위해서 살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처음부터의 삶의 정위치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을 통해 "사랑이 무엇인지 아는 것"(요일 3:16)과 똑같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비로소 "사는 것이 무엇인지 배우는 것"이다. 한 몸으로 살면 머리를 위시해서 몸의 각 지체의 모든 것이 나의 소유가 되고 내가 내 것으로 누림이 되니 머리를 위시한 모두가 바로 '나 자신'이 된다. 이것은 서로가 사랑으로 종 노릇하여 섬기는 터이므로 자연적으로 자동적으로 그렇게 된다. 그러나 내가 나를 위하는 경우 내 것은 내 것밖에 없고 서로 미워하고 시기하고 해치는 등의 악(범죄)만 무성하게 되고 그렇다고 요행히 운수 좋은 자만 살 수 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고 모두가 함께 결국 망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나갈 이유가 하나도 없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후 하늘에 오르신 것도 아담이 초자연계 몸이었음을 증명하는 것으로서, 아담으로서의 죄 값을 다 치르신 다음이므로 계속해서 자연계 몸에 속박되어 있을 일체의 이유가 없다. 첫 사람 아담이 범죄 전 초자연계 몸이었던 것과 같이 초자연계 몸이 되셨기 때문에 하늘에도 오르실 수 있었던 것이고 지금 하늘의 하나님 우편에 계시는 것이다.

또 한 사람으로서 죽음에서 살아나셨으면 의당히 그 살아나신 몸으로 이 세상에 계속 살으셔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그러나 자연계 몸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초자연계 몸이시기 때문에 하늘에 지금 계시고 이렇게 하늘에 우리 눈에 보이시지 않게 계시는 것은 자연계 몸으로 계시는 것과 똑같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와 같이 하늘에 계시는 것은 목적이 있어서이고 구원 받을 사람 다 구원된 다음에는 반드시 이 자연계 인간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내시게 되어 있음이 필연이다. 방금 설명한 대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니까 그 부활하신 그대로 세상에 계셔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 다시 오시는 이유 중의 하나다.

마지막 아담께서 그 성령으로 나와 함께 사시는 것은 육체를 가진 한 개인이(그가 내 남편이든 아내든 그 누구든 간에) 나와 함께 사는 것과 똑같은 것이다. 단지 성령으로 계시기 때문에 보이시지 않고 우리 육감으로 인지할 수 없다는 그 차이뿐이다. 이런 사실들은 심오하거나 오묘한 것도 아니고 상식 차원에서 얼마든지 수긍할 수 있는 일인데도, 거의 모든 사람들이 구원받고 영생한다는 이 자아중심의 이기주의 욕심을 믿음이라 착각하도록 만든 사탄의 인위적 교리로 인해 마치 큰 일이나 되는 듯이 이런 설명에 낯설어하는 것임을 재차 강조한다.

정상적으로 성경을 이해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삶이라면 이런 설명이 있기도 전에 벌써 그 인도하심(가르치심)을 따라 충분히 납득하고도 남을 일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마지막 아담께서는 내게 남편이나 아내가 있어 그 아내와 남편을 대하는 것과 같은 똑같은 사람이신 것이요 보통 사람과 하나도 차이가 없으시니, 그래서 여자의 태를 통해 세상에 오시지 않았는가. 고난 받으시기 전에도 항상 당신 자신을 가리켜 인자(人子, the Son of man)라고 하시면서 사람이심을 강조하신 것이다.

동시에, 하나님이신 점에서 우리와의 차이는 명백하다. 하나님이셔야만 우리 각 사람을 구원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셔야 즉 성령으로 계셔야 모든 믿는 각 사람과 상대하시어 그와 함께 하나되시고 사시고 일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죽으심이 나의 죽음, 그 부활이 나의 부활, 그리고 그 승천과 하나님 우편에 앉으심이 바로 나의 승천, 하나님 우편에 함께 앉아 있음이 될 수 있는 까닭이다.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 인간의 육체로는 절대로 우리 각자 앞앞이 오셔서 함께 하나가 되실 수가 없다. 우리의 영혼처럼 되어 계시기 때문에 육체와 영혼이 불가분인 것처럼 함께 사시는데 이것이 얼마나 자연스러운가. 무엇이 이상하다는 것인가. 재인식, 인식 전환이 필요하다.




인류사상 성경 외에 인간을 완전 해부한 것은
3운법칙과 3위1체의 원리밖에는 없다
이런 중대한 사실이 오늘에서야 알려진 것은
오늘 이 시대가 그만큼 중대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증거다

인간 삶이 하나님의 통제 아래 있고
이로써 ① 하나님의 실존(성경에서 밝히고 있는 하나님)과
② 인류가 구제될 수 있는 구체적 방안인 마지막 아담과
③ 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제로 하는 성경의 진실성을 입증함에서는
3운법칙과 3위1체의 원리 이상 가는 것은
이제까지 나타나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3운법칙과 3위1체의 원리가 모두 성경에서 나왔음이다.
성경이야 말로 하나님의 이 세상 창조의 사실을 밝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 구원의 유일한 하나님의 방책임을 밝히는데
이 3운법칙과 3위1체의 원리가 이러한 성경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인간의 학문이나 지식이라는 것은
피상적인 것으로서 겉과 주변만 맴도는 것이거나
한 쪽 면 즉 자연계 외곬으로만 파들어가는 것이었으니
이는 오직 적 그리스도의 초능력 과시를 위한 징검다리 역할뿐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 세상 신(神)이 인간의 모든 것을 조종하기에.
고로 근본적인 것에는 접근치 못하도록 사력을 다해 차단시켜 놓은 것.

그러나 3운법칙과 3위1체의 원리에 대해서는
그러한 악령의 간섭이 미치지 못하는 것이니
마지막 복음(福音, 구원의 희소식, 좋은 소식) 전파를 위해
천사들이 막강한 능력으로 세상에서 활동하는 시발점이기 때문.

악령들 자신만으로 보아도 이런 진리를 굳이 차단시키기 위해
이전처럼 사력을 다할 필요가 없는 것은
그 자신 창조신으로 가장하여 활동하는 데에 역으로 이용할 수 있다는
계산 아래 거의 방관 수준에 있기 때문이다.

과거 인간의 삶, 그 생애 자체를 이같이 낱낱이 해부할 수 있었던가.
3운법칙에 의해 인간은 '역사'라는 무대에서 한낱 '꼭두각시'요 배우'다.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기고만장해 있던 인생들을
하나의 벌레처럼 자기를 인식하게 만든 것이다(사 41:14).
오직 마지막 아담과 연합해야만 진정한 사람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들로서의 당당한 제 자리를 회복하게 된다.

영원히 사느냐 아니면 죽지 못해 존재하는 고난 고통의 연속이냐 하는
두 가지 노선을 놓고 각자 스스로 자기 운명을 결정 짓는다는 것은
얼마나 무섭고 떨리는 일인가ㅡ오직 그 양자 택일만을 위해
오늘날의 당신의 목숨, 나의 목숨이 붙어 있는 것이다.
처음에는 올바른 선택을 했다가도 나중에 이를 번복하는 일도 "많다"ㅡ
성경은 이를 끊임없이 반복하여 경고하고 있다.

지금 올바른 결정을 했다고 대수가 아니고 전부가 아니다.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히 2:3)ㅡ이 등한히 여김으로 인해
애당초 믿지 않음과 같이 되는 비극적 결말이 됨을 성경은 간단없이 경고하고 있다.
이와 같은 경고를 소위 "교회"는 발해 본 적이 없다.
복음 자체를 본질적으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머리가 없어서도 아니고 인격적 결함이 있어서도 아니다.
찾고 구하고 두드림이 없기 때문이다. 현상 만족에 취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 웃는 자, 부유한 자가 화가 있다, 재앙이 있다 하신 것이다.
현재 상황에 안주하고 있기에 그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