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4월 26일 화요일

속아 산 세상ㅡ 다시 여전히 속으면서 자멸 행위를 하려는가 (1)


세상이여, 나는 분명히 "속아 왔다!"고 말했다. 무엇에 속아 왔는가. 그대들이 부정(否定)해 온 "신(神)"에 의해 속아 왔다. 그대들은 "신"이라고 하면 창조자밖에 모르는데, 바로 그대들의 코 앞에서 숨쉬고 있는 신이다. 그러하고도 신이 있는지 없는지 조차도 모르고 신을 무조건 부정해 왔으니 얼마나 비참하냐. 지금도 절대 다수가 이 속고 있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신 자체를 부정하고 있는 판이니 알 리가 없다.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그럼 속고 있다는 것을 알고 세상에 대하여 "속고 있다"고 말하는 나는 무엇인가. 무슨 근거로 그렇게 말하고 있는가.

3위1체의 원리 및 3운법칙(인간 생애를 철통같이 주관하고 있는 3갈래로 된 법칙)의 권위로써 이 말을 하고 있다. 인간 생애를 주장하고 있는 이 3갈래의 법칙은 지금까지 그 누구도 말한 역사가 없다. 안 적이 없었다. 바로 그 권위로써 말하는 것이다. 본인 자신에게 어떤 권위가 있다는 말이 아니다. 착각하지 말 것이다. 3운법칙과 3위1체의 원리 자체의 권위를 두고 하는 말이다. 본인은 어디까지나 대행자 곧 대신 말하는 자일 뿐이다. 어느 누구든 이 법칙을 발표하는 자가 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 개똥이든 쇠똥이든 철수든 누구든 '한 인간'이 발표하게 되어 있다. 바로 그런 '한 인간'일 뿐이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가리키는 달이 중요한 것이니 달을 보라는 뜻이다. 달은 어느 누구의 손가락이든 가리킬 수 있는 것이다. 고로 손가락이 대수가 아니요 달을 보는 것이 대수다. 이제는 그 누구든 자기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면 되는 것이다.

달은 처음 그 달을 가리킨 사람만의 소유물일 수 없다. 처음부터 달은 있었고 그 달을 손가락으로 가리킨 것뿐이다. 고로 지금부터는 그 어느 누구든지 달을 가리킬 때 손가락을 들어 그 쪽을 향하면 되도록 돼 있다. 어린 아이라도 할 수 있고 바보라도 할 수 있고 글자를 모르는 사람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것은 온 세상이 속고 있다는 사실을 밝히는 '권위'를 말한 것이지, 3운법칙이나 3위1체의 원리를 말하고자 함은 아니다. 온 세상이 지금까지 그리고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속아 왔고 속고 있고 속을 것이라는 사실을 적시하는 것뿐이다.

그러나, 이상하지 않은가. 속고 있다고 항거할 수 없는 권위를 가지고 말하면 그대로 믿어야 할 것인데도 믿지는 않고 그대로 여전히 계속 속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다. 그것이 이상하다는 것인데, 실상 이상할 것도 없으니 속는 자에게 속이는 자는 불가항력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신이기 때문이다. 오직 이 신을 능가하는 존재의 권위로써만 이 속이는 악신(惡神)을 이길 수 있는 까닭이다. 슬프다,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이 이런 악한 신(영)에게 꼼짝없이 당하고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얼마나 황당한 일인가. 그러나 현실이다. 이 무서운 현실을 직시하라는 것이,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의 몫이다.

한 가지 예로 인간이 이 신(초자연계 존재)들 위에 군림하는 자로 창조된 사실이 이 속이는 자에 의해 숨겨져 온 것이다. 하나님의 선민이었던 유대인들도 이런 사실은 몰랐다. 몰랐기 때문에 지금까지 기록상 찾아볼 수 없어 처음부터 없는 사실이라고 하여 믿지 않는 것이다. 왜 이들마저도 몰랐는가 하면 그런 것을 아는 지식이 대수가 아니라 방금 말한 대로 인간이 초자연계 존재로 복귀하여 그 영광을 다시 누리는 것이 근본적으로 풀어야 할 숙제였기 때문이다. 이것이 선결 문제로서 이 이상 가는 현안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시는 날까지 유보된 것은 당연하다. 이 근본 문제를 풀면서 모든 것은 자동적으로 알려지게 되어 있었다.

마침내 "마지막 아담"(고전 15:45)께서는 세상에 나타나셨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밝히셨다. 물론 방금 지적한 사실도 알리셨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마지막 아담이심을 믿지 않은 유대인들은 당연히 그 말씀을 믿을 리 없다. 그래서 오늘날까지도 유대인 사회에서 에덴낙원의 뱀이 용이고 사탄이요, 첫 사람 아담이 초자연계 존재였고, 에덴 동산이 이 자연계가 아니라 초자연계였음을 알지 못하고 있는 유일한 이유다. 이런 사실을 모르는 "신학자"들은 유대인도 모르는 것을 알려고 한다는 것 자체가 의아스럽다고 하여 어리석게도 이런 생각 자체를 아예 버린 것이다. 하나님의 계시를 따르지 않고 인간의 지식에 의존하는 어리석음이 항상 이와 같다.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짓거리만 영원히 계속하는 것뿐이다. 

이리하여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의 말씀을 믿고 있었던 제자들 그리고 그 가르침을 받았던 초대교회는 이런 모든 사실을 알고 있었음은 당연하다. 그 명확한 증거를 바울 사도의 '롬 5:12'(범죄하지 않았다면 아담이 지금도 살고 있었을 것이요 자연계 몸으로는 지금까지 살지 못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므로)나 요한 사도의 '계 12:9', '계 20:2'(용을 창세기의 그 "옛 뱀"이라고 지적하고 있기에)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바울 사도 생전에도 "그리스도를 신속히 떠나" "다른 복음", "다른 예수", "다른 영"을 따르는 것을 "이상히 여긴다"(갈 1:6)고 했을 정도인즉, 그리스도의 말씀에 착념치 않으면 지체없이 사탄의 어두움의 보자기는 즉시 즉각 덮어 씌어지는 판인즉 올바른 말씀 해석에서 벗어나는 것은 "이상하리만치" "신속했던" 것이니 우리는 이 점을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아야 하는 것이다.

왜냐면 이런 실상이 알려지는 것이 이 세상 신 사탄에게 덕될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까닭이다. 그래서 신속하게 그런 사람들의 생각을 비틀어 자기 정체가 드러나지 않는 방향으로 틀어 놓은 것이니 그런 일은 사탄에게 식은 죽먹기다. 그리고 말씀을 버리는 자 또는 외면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가르치심이 더 이상 나타나지 않게 되는 하나님의 원리원칙 지키심이 철저하기 때문이요 이를 사탄은 또한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영향을 아니 받을 수 없는 후대 사람들이 소위 "교부(敎父)"들의 글에 없다 하여 철저히 외면하기에 이른 것이다. 다시 말해 에덴 동산은 자연계에 속한 일부 동산이요 아담은 자연계 몸으로 있다가 범죄하여 "죽었다"고 믿고 있는 것이요, 더군다나 당장 고꾸라져 죽지 않고 천년 가까이 살았다고 하여, 말씀하신 것과는 달리 아담이 "죽지 않았다"고 공공연히 말하는 정도가 된 것이다. 생각해보라, 하나님의 말씀이 이 정도로 대접을 받고 있는데 거기에 무슨 산 믿음이 생기겠는가. 이런 것이 "속아 사는 세상"의 실상인 것이다.


그 결과 오늘날까지도 에덴 동산이 자연계인 줄 믿고 있고 아담이 자연계 몸으로 살다가 죽은 것이라 믿고 있고 에덴 동산이 지구 어디엔가 있거나 또는 노아의 대홍수 당시 매몰되었다고 믿고 있고, 믿어야 하는 것은 믿지 않고 이 세상 신이 펴놓은 거짓말과 속임수는 철저히 믿어주고 있는 것이다. 진실로 가슴 섬뜩해지는 일이 아닌가. 얼마나 사탄에게 매여 있고 그 손아귀에 사로잡혀 있으면 이 지경, 이 정도라는 말인가. 

소위 성경을 믿는다는 기독교계가 이러할진대 성경도 하나님조차도 믿지 않는 기타 세상 사람들이야 말할 것도 없다. 소크라테스는 인생의 가장 큰 현안 문제 해결로서  "자신을 알라"고 했다. 이것이 바로 그 뜻이다. 속고 있는 나 자신, 속고 있는 세상임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이 세상 신(고후 4:4)을 가리켜 성경은 "온 천하를 속이는 자"(계 12:9)라고 한 그대로다. 

2016년 4월 10일 일요일

말없이 선 봉우리야 네가 무엇을 우리에게 묵시(默示)하느냐-"둘이 하나됨의 축복"이로다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와 나와의 '둘이 하나됨'의 이치가
단지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의 이론처럼 착각해서는 안되는 것ㅡ
실제 상황이 됨으로써 일상 삶으로 반영되어 나타나지 않고는 일체가 무의미.
성령 충만했던 베드로가 성령께서 임하시던 당일 우리의 성령 받음 즉
구원 받음을 가리켜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님을 뵈웠음이여" 한(행 2:25) 
다윗의 성령 감동으로 말한 대목을 지적한 것은 아주 핵심을 짚은 것이다.
구원 받음은 그리스도와 매일 매시 말 그대로 함께 둘이 하나되어 사는 삶을
가리킴이니 "예수님께서 우리 위해 죽으심은 우리가 깨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심"(살전 5:10)이라 한 그대로이다.

그렇지 못하면 자아중심으로 흐르기 쉽고 그리스도 중심의 삶이 되지 못한다.
구원 받은 증거는 그리스도와 둘이 하나됨을 인하여 자기 부인으로 일관하고
따라서 머리를 모신 한 몸의 지체된 삶으로서 매일 자기 십자가 짐에 있음을
명심할 일이니 머리와 몸의 둘이 하나됨은 모든 지체된 이웃과 하나되는 의미로서
바로 이 이치를 따라 사람들을 구원해내고자 이 세상에 고난 받으며 남아 있음이다.
고난 받음으로써 사람들 구원해내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면 이 세상 몸 둘 이유가 없다.
우리의 삶은 범죄하기 전 아담의 초자연계 몸으로 누렸던 삶을 의미함이다.
그러나 우리가 아직 여전히 이 구차스럽고 초라하고 연약한 자연계 몸이다.
그래서 이를 가리켜 성경은 "우리가 죽었다"(골 3:3) 하였다. 

죽었으니까 "우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다"가 된다(:3).
이와 같이 이 세상에서 똑바로 걷는 우리의 정자세는 "죽은 자"로서의 위치다.
이 "죽은 자"로서의 모습이 이 세상에서는 '산 자'라는 증거인 것이다. 
때문에 세상 삶의 "쾌락을 사랑하는 것은 죽은 것"(딤전 5:6)이라 정의했다. 
이 죽은 자의 자세ㅡ이것이 날마다 사형장으로 나아가는 사형수의 모습 곧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런 모습으로 앞서신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의미다.
이와 같은 모습이 아니고는 "나의 제자가 될 수 없다" 하셨으니 명심할 일이다.
이것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해야 천국에 들어간다" 경고하신 뜻이다.

말씀 전달한 선지자 노릇, 귀신 쫓아내고 능력 행하는 등 아무리 화려한 경력이 있어도
이와 같은 모습이 되지 않는 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함을 명심할 일이다(마 7:21-23).
오죽하면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 해도 못하는 자가 많다"(눅 13:24) 하셨을까!
이는 천국 들어가기 어렵다는 말씀이 아니라 그런 현실을 적시하심이다.
왜냐면 "어렵다, 누가 가능하겠느냐" 하고 제자들이 놀라마지 않았을 때
"사람은 할 수 없되 하나님께서는 능치 못하심이 없다"(눅 18:27) 하셨기 때문이다.
이것이 둘의 하나됨이니 나는 오직 그리스도와 하나됨을 힘쓰는 것이요 
나로서는 오직 "힘씀"(13:24)에 있지 그 힘쓴 결과로 이루어내는 것은 관심사가 아니다.

그것은 주님의 관심사이다. 주님의 몫이다. 작대기의 이끝은 나의 몫, 저끝은 주님 몫이다.
하나님을 사랑하여 "항상 복종하기(빌 2:12)로 힘쓰는 것 그 이상을 요구하지 않으신다.
"나 자신의 구원을 이룸"(:12)도 작대기의 이끝과 저끝으로 나누어지는 역할 분담이니
내가 이루기를 힘쓰면 주님도 함께 움직여주시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내가 힘쓰는 정도까지 역할 분담해 주시는 것이 사랑과 구원의 양면성.
때문에 내가 주님 부인하면 주님도 부득불 나를 부인하실 수밖에 없게 된다(마 10:33).
말의 핵심은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려 힘쓰는 데에만(고후 5:9/고전 7:32)
주력(注力)을 하라는 것이니 그것이 오직 나의 할 일인 것이다.
그 결과 여부는 내가 신경 쓸 일이 아니니 왜냐면 내가 주님과 둘이 하나되어 있기 때문.

그래서 이 둘이 하나되어 있는 관계 다시 말해 나는 주님 보고 주님은 나를 보시고
나는 주님을 위해서만 모든 삶의 기력, 정력을 다하고 
주님은 오직 나만을(당신 자신을 위하심 없이) 위해 그렇게 하시는 사실을
상징적인 그림으로 나타내어 항상 마음 가운데 각인시킬 것이 없는가 하여
찾다가 발견하여 올려놓은 것이니 부디 우리 모두 그리스도 의식
(Christ-consciousness)으로 일관되게 이생의 나그네 길 달음질에 임할진저.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저들이 수고함으로(둘로서의 적절한 노력으로)
 좋은 결과를 얻을 것임이니
혹시 저들이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을 것이요,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는 것이니 
삼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않는 것이다"[전 4:9-12].

하나이면서 둘(duality as unity)-둘이면서 하나(unity as duality)의 영원한 노래


둘이 짝을 이룬 하나의 삶ㅡ가장 행복한 삶의 구조
모자(母子) 관계(아버지와 아들)
영혼과 육체
머리와 몸
그리스도와 나
왼손과 오른손 그리고 왼발과 오른발
나는 너를 보고 너는 나를 보고
나는 너를 위하고 너는 나를 위하고
나는 너를 항상 의식하고 너는 나를 항상 의식하고
너는 나의 삶이요 생명, 나는 너의 삶이요 생명
너는 내가 되어 나는 네가 되어
영원히 우리는 하나
갑과 을은 영원히 불가분의 관계로 병으로서의 하나를 이룸
이것이 삶의 법칙, 인간 구원의 법칙
만유를 창조하셨고 존속 유지시키시는 만유의 법칙 곧 3위1체의 원리



하늘에서 주님 외에 누가 제게 있습니까
땅에서 주님 외에 제가 사모할 이 아무도 없습니다
(시 73:25)

바요나 시몬아, 네가 이 모든 것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바요나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을 먹이라
바요한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을 먹이라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와 나와의 '둘이 하나됨'의 이치가
단지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의 이론처럼 착각해서는 안되는 것ㅡ
실제 상황이 됨으로써 일상 삶으로 반영되어 나타나지 않고는 일체가 무의미.
성령 충만했던 베드로가 성령께서 임하시던 당일 우리의 성령 받음 즉
구원 받음을 가리켜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님을 뵈웠음이여" 한(행 2:25) 
다윗의 성령 감동으로 말한 대목을 지적한 것은 아주 핵심을 짚은 것이다.
구원 받음은 그리스도와 매일 매시 말 그대로 함께 둘이 하나되어 사는 삶을
가리킴이니 "예수님께서 우리 위해 죽으심은 우리가 깨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심"(살전 5:10)이라 한 그대로이다.
그렇지 못하면 자아중심으로 흐르기 쉽고 그리스도 중심의 삶이 되지 못한다.
구원 받은 증거는 그리스도와 둫이 하나됨은 인하여 자기 부인으로 일관하고
따라서 머리를 모신 한 몸의 지체된 삶으로서 매일 자기 십자가 짐에 있음을
명심할 일이니 머리와 몸의 둘이 하나됨은 모든 지체된 이웃과 하나되는 의미로서
바로 이 이치를 따라 사람들을 구원해내고자 이 세상에 고난 받으며 남아 있음이다.
고난 받음으로써 사람들 구원해내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면 이 세상 몸 둘 이유가 없다.
우리의 삶은 범죄하기 전 아담의 초자연계 몸으로 누렸던 삶을 의미함이다.
그러나 우리가 아직 여전히 이 구차스럽고 초라하고 연약한 자연계 몸이다.
그래서 이를 가리켜 성경은 "우리가 죽었다"(골 3:3) 하였다. 
죽었으니까 "우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다"가 된다(:3).
이와 같이 이 세상에서 똑바로 걷는 우리의 정자세는 "죽은 자"로서의 위치다.
이 "죽은 자"로서의 모습이 이 세상에서는 '산 자'라는 증거인 것이다. 
때문에 세상 삶의 "쾌락을 사랑하는 것은 죽은 것"(딤전 5:6)이라 정의했다. 
이 죽은 자의 자세ㅡ이것이 날마다 사형장으로 나아가는 사형수의 모습 곧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런 모습으로 앞서신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의미다.
이와 같은 모습이 아니고는 "나의 제자가 될 수 없다" 하셨으니 명심할 일이다.
이것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해야 천국에 들어간다" 경고하신 뜻이다.

말씀 전달한 선지자 노릇, 귀신 쫓아내고 능력 행하는 등 아무리 화려한 경력이 있어도
이와 같은 모습이 되지 않는 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함을 명심할 일이다(마 7:21-23).
오죽하면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 해도 못하는 자가 많다"(눅 13:24) 하셨을까!
이는 천국 들어가기 어렵다는 말씀이 아니라 그런 현실을 적시하심이다.
왜냐면 "어렵다, 누가 가능하겠느냐" 하고 제자들이 놀라마지 않았을 때
"사람은 할 수 없되 하나님께서는 능치 못하심이 없다"(눅 18:27) 하셨기 때문이다.
이것이 둘의 하나됨이니 나는 오직 그리스도와 하나됨을 힘쓰는 것이요 
나로서는 오직 "힘씀"(13:24)에 있지 그 힘쓴 결과로 이루어내는 것은 관심사가 아니다.
그것은 주님의 관심사이다. 주님의 몫이다. 작대기의 이끝은 나의 몫, 저끝은 주님 몫이다.
하나님을 사랑하여 "항상 복종하기(빌 2:12)로 힘쓰는 것 그 이상을 요구하지 않으신다.
"나 자신의 구원을 이룸"(:12)도 작대기의 이끝과 저끝으로 나누어지는 역할 분담이니
내가 이루기를 힘쓰면 주님도 함께 움직여주시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내가 힘쓰는 정도까지 역할 분담해 주시는 것이 사랑과 구원의 양면성.
때문에 내가 주님 부인하면 주님도 부득불 나를 부인하실 수밖에 없게 된다(마 10:33).
말의 핵심은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려 힘쓰는 데에만(고후 5:9/고전 7:32)
주력(注力)을 하라는 것이니 그것이 오직 나의 할 일인 것이다.
그 결과 여부는 내가 신경 쓸 일이 아니니 왜냐면 내가 주님과 둘이 하나되어 있기 때문.

그래서 이 둘이 하나되어 있는 관계 다시 말해 나는 주님 보고 주님은 나를 보시고
나는 주님을 위해서만 모든 삶의 기력, 정력을 다하고 
주님은 오직 나만을(당신 자신을 위하심 없이) 위해 그렇게 하시는 사실을
상징적인 그림으로 나타내어 항상 마음 가운데 각인시킬 것이 없는가 하여
찾다가 발견하여 올려놓은 것이니 부디 우리 모두 그리스도 의식
(Christ-consciousness)으로 일관되게 이생의 나그네 길 달음질에 임할진저.     



어린 아들은 엄마 곁을 떠나지 않아(우측으로 약간 치우친 중앙에 위치한 둘의 모습)
하나님과 나와의 부자 관계의 모습이 이러하다 
모자봉(母子峰)






마음으로 주님께 노래하며
(making melody in your heart to the Lord)

2016년 4월 9일 토요일

세상에서의 최고도의 완성된 미학(美學)


전지전능하신 이의 어버이 사랑의 아름다우심이여!

머리와 몸이 한 몸 체제가 되어 동고동락하는 것ㅡ이 이상으로 이상적인 삶의 구조는 없다. 전지전능하시다 하여 그냥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영생을 다시 선물하시는 것이 아니라, 친히 우리의 죄인으로서의 저주에 동참하시고 함께 고통 당하심으로써 우리의 죽음을 맛보시고 함께 하나되는 이치로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은 드라마나 소설로 꾸민다고 하더라도 너무나 아름다운 주제가 된다. 이 모두 한 몸됨의 하나되는 원리원칙대로 하나님 친히 따르심이니 이렇게 원리원칙대로 모든 일을 처리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은 아름다움 그 자체이시다. 여기에는 모든 의(올바름), 선(좋은 것), 그리고 공평공정함이 보장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우리 인간들 역시 자주 독립성을 100프로 보장하심이니 영생을 선물로 주신다고 덥석 받아 챙긴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 사랑의 주인 의식으로써 시종 일관하여 하나님의 이 새 창조 작업에 함께 동참함으로써 우리 자신의 구원을 이루는, 다시 말해 마치 우리 스스로 우리 구원을 이루는 그런 형식을 닮게(밟게) 하심이니 이 또한 어느 모로 보나 아름다운 것이다. 피동적(수동적)이 아닌 적극성으로 주체 의식을 최대한 발휘하게 하심은 나중 후회할 것 없는 사랑의 나라에서의 능동적인 풍성한 삶을 누림에 한없는 보람을 느끼게 하심이다. 나도 천국 건설에 한 몫 했다는 무한한 자부심을 느끼게 하시도록 하는 배려이시다.

지금까지 창조자 하나님께 대한 그릇되고 막된 인식은 이 세상을 지배하는 "이 세상의 신(神)" 사탄이 인생들의 마음에 심어놓은 것으로서 그래서 퍼뜨려진 것이다. 모든 인생의 자연계 존재로서의 무기력성은 초자연계에 속한 영물(靈物)로서의 막강한 위력의 초능력 앞에 허수아비와 같은 것으로서 일방적으로 당하는 위치일 수밖에 없다. 물론 동일하게 막강한 "거룩한 천사"들의 맞대응이 있으나 우리 인간의 이 배후 세력은 우리 자신 정확히 말해 나 자신의 태도 여하에 따라 좌우되어 나타나는 것이므로 항상 강조되는 것은 "마지막 아담"(고전 15:45)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나와의 관계이다. 즉 머리와 몸의 관계로서의 한 몸됨에 나 자신 얼마나 부응하고 호응하느냐, 여기에 달린 것이다.

사탄과 맞설 수 있는 거룩한 천사로서의 상대는 미가엘이라는 천사다(계 12:7/단 10:21). 우리 인간들 때문에 맞붙은 대규모 전투로서는 최초이자 최후의 이 하늘 전쟁(우주 전쟁)에서 성경대로(계 12:7) 패퇴한 사탄은1908년 6월 30일 지구상에 영구 추방당함으로써 지금 세상은 이들 악령들로 가득 차 있다. 소위 "외계인" 또는 "ufo" 소동이 오늘날 대규모로 벌어지고 있는 것도(물론 이 이전에도 조금씩 나타나기는 했어도) 이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류사가 시작된 이후 연대별로 따지면 바로 지금 이 때가 비상 시국이 되고도 남는다.

사탄 등 악령 일당은 패전으로 인한 분노가 극에 달해 있을 뿐 아니라 하늘에서는 더 이상 자리를 확보 못함으로 인해 상처 받은 결과로 이전보다는 상대적으로 약화되어 있는 처지에서 또한 그렇다. 그래서 지금까지 에덴낙원에서의 "뱀"이라는 그 정체가 효과 있게 숨겨져 왔지만 지금은 대대적으로 폭로되는 시점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좌냐 우냐, 생명이냐 영원 멸망(멸망은 존재의 인멸이 아닌 생명의 낙과는 상대성을 이루는 고난 고통 일색뿐임을 의미)이냐 양자 택일의 결단만이 요구되는 때이다.

이런 가장 합리적인 이치에 따른 인간 구원은 악령이 감히 모방 못한다. 초능력으로써는 거짓된 것과 합쳐(살후 2:9-11) 전무후무한 것으로 과시할 수 있어 여기에 무지무식한 이들이 많이(거의 전부라 할 정도로) 넘어가겠지만 이와 같은 진리의 합리성으로 따져서는 감히 미치지 못할 것이니 이 점에 착안하여 그 모든 태풍 같은 위세의 시험과 유혹을 능히 이길 일이다. 가령 모방한다 하더라도 이미 기정 사실화한 것을 베끼고 모방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므로 그 거짓됨을 그로써 자체 증명함이 될 것이기에 이에 자세히 유의할 필요가 있다.

요점은 우리의 이 세상에서의 고난 받음, 욕됨을 당함(그래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나도 그를 부끄러워할 것"이라는 사전 경고를 주셨지만) 그리고 죽임 당함은 우리가 기피할 일이 아니라 받아 마땅하고 사모해 마지 않을 "은혜로 주신 것"(빌 1:29)이라는 사실이니 우리는 이를 명심해야 하는 것이다. 기뻐 뛰놀라 하시면서 아이들 같이 껑충껑충 뛸 정도의 것임을 밝히셨으니(눅 6:23) 이 또한 마음에 새길 일이다. 사랑의 하나됨 즉 3위1체의 원리에서 내 생명은 그리스도 자신의 모습이시니(그 대신 고난 받는 모습은 그리스도의 모습이 되어) 우리의 머리터럭 하나도 상함이 없다고 하신 것이다(눅 21:18).


그러므로 아름다우신 하나님을 모시고 아름다움을 구현하는 우리의 삶이니 사랑의 아름다움이요 평안과 기쁨과 감사의 실천적 미학(美學)이다. 그 시절 로마 콜로세움 경기장으로 사자의 밥이 되기 위해 줄 지어 향하던 발걸음의 그리스도 사람들의 행렬에서 어린 아이를 안고 가는 한 젊은 엄마의 희망과 기대와 사랑의 순수함에 한껏 겨워 노래 부르며 가는 그 찬미가를 듣고 너무나 놀란 한 구경꾼은 그 자신 믿음에 들어가 후세에 그 사실을 기록으로 전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아름다우신 그리스도의 능욕(reproach)을 지고 영문 밖으로(세상 사랑과 삶의 낙 밖으로) 그 분을 따라(사랑의 실천으로 당하신 고난이요 지금도 우리와 함께 당하시는) 나아가는 우리의 입술에는 사랑의 송가(頌歌)가 가득 차고 넘치며 끊이지 않는 것이다(히 13:13-15). 시편 139편, 시편 23편도 그런 송가 중의 하나이다. 아니, 성경 전체가 노래 가사 아닌 것이 없다. 

............................................................................


"지하교회"란 말은 어폐가 있다. 초대교회 형태를 벗어나, 이 세상이 마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된 것처럼 교회당 건물을 보란 듯이 크게 짓고 하나님의 교회랍시고 위세를 과시하던 지금까지의 무지한 교회 운영을 기준하여 하는 말이기에 그렇다. 마지막 아담께서 다시 오시기 전까지는 핍박 받는 것으로 시종일관하게 되어 있는 교회의 본래의 사명을 망각한 세속적 표현이므로, 우리는 마땅히 "초대 교회 형태"라고 고쳐 불러야 마땅하다. 아니라면 "세포(cell) 교회"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세포"라는 의미는 핵 분열하듯이 12명을 적정 단위로 하고 그 이상으로 불어나면 반으로 다시 쪼개어 6명 선에서 출발, 계속 그렇게 해서 사람들을 불려 나가는 방법이다.

이렇게 해서 매일 모이고(매일 모이는 것으로 원칙으로 삼고 적절하게 신축성 있게 운영하면 될 것이니 개인 사정을 따라 불가피하게 빠지는 날이 있을 것이므로) 일주 한번은 기백명이든 천명이든 전체가 한 번에 모여(건물이 없을 때는 하루쯤 임차해도 무방할 터) 대집회를 여는 구상도 좋은 것이다. 어쨌든 틀에 박힌 것에 집착하여 화석화(化石化)하는 것을 막도록 힘쓸 일이다. 생명체는 환경에 순응하여 적절히 변화하는 것이 특색이다. 그런 변화가 없으면 목석과 비교해 나을 것이 무엇이랴.

앞 글에서 악령들이 속일 때 "기독교는 지금까지 인류 생활을 향상시키지 못했다. 현재에도 평화와 안녕의 질서를 지키지 못했으니 어찌 미래의 영생의 약속인들 제대로 지킬 것이냐" 식으로 무지한 인생들에게 접근한다 했거니와, 실상 이런 점에서 성경의 가르침을 비판하는 이들이 많은데, 인간 스스로 그렇게 생각한다기보다 악령들이 이런 식으로 성경을 오해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오늘날에 이르러, "내가 바로 구원자다" 하고 나설 준비로써 그런 생각을 광범위하게 인생들의 뇌리 속에 미리 각인시켜 놓았다 함이 옳은 분석일 것이다.

성경은 이 세상에서의 안녕과 복락을 약속한 일이 없다. 이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하는 것이니, "악인에게 평안이 없다"고 성경이 처음부터 선언한 것처럼, 악인 즉 자아중심으로 나가는 인간이든 영물이든 단 하나라도 있을 때 그 사회는 안녕과 질서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면 그 하나가 들어 얼마든지 전체 사회를 온통 흐려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탄 하나가 들어 전체 인간을 죽음에 몰아넣을 뿐 아니라 모든 피조물을 고통 속에(한 몸으로서의 체제이므로) 빠뜨린(롬 8:22) 현재의 예를 들어도 알 수 있지 않은가.

이런 상태에서의 안녕과 평안을 요구한다면 그것은 강제와 간섭에 의한 것일 수밖에 없다. 지금은 악인 혹은 죄인들을 회개시키는 때요 그런 장소(무대)로서의 세상인 것이다. 생명의 핵심이 사랑이 되어 있는 속성상 절대로 강제적 수단으로 평안과 안녕을 보장할 수 없는 일이다. 자진 자발적인 자유인으로서의 선택에 의해 그래서 의와 선(그 총합이 바로 한 몸 체제에서의 삶)을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사수하는 이들로써 구성된 사회라야 자유, 평등, 박애의 이상이 구현되는 것.

그러므로 필연적으로 이 세상에서는 악인이 승승장구하고 득세할 수밖에 구조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의인(선인)은 밀리고 부대끼고 박대를 당하는 것이 필연으로 되어 있다. 성경은 이를 다시 필수적인 것으로 가르친다. 이유는 생명 가운데 있는 의인이 구원의 대상자의 죽음에 동참하여 하나가 되어야만 그의 죽음이 의인의 생명으로 전환될 수 있다는 항구불변의 삶의 법칙(이는 또한 구원의 법칙이니 곧 머리와 몸으로서의 한 몸됨의 이치)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친히 본을 보여주신 바다.

적 그리스도의 거짓된 속임수의 수작은 그런 소위 "외계인"의 메시지 전달에 의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과 같이 강제력에 의한 통일, 통할이다. 그런 강제적인 것은 위의 설명처럼 절대로 용납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고로 이 영원한 삶의 법칙을 애호하여 준수하는 하나님의 의인들은 이 세상에서 사람들을 건져내는 갸륵하고 숭고한 작업에서 모든 고난과 죽음을 각오하고 있기에 악령들이나 악인들의 위협이나 회유가 먹혀 들 수가 없다.


성경 내용의 합리성은 가장 논리적이고 상식적인 것이 총동원되어 있는 것임을 항상 명심할 일이다. 그러기 때문에 진리인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시니까 그런 것이다. 모든 법칙의 창조자이시니까 그런 것이다. 법칙에 모순이나 자가당착이 있다면 그것은 더 이상 법칙일 수 없다. 이런 사실은 외면한 채 그리고 알려고도 않은 채 "무조건 믿는 것이 대수다' 하고 무식하게 가르쳐 온 것이 오늘날까지의 서글픈 실상이었다. 여기서 한시 바삐 탈피할 일이다.

소위 "ufo", "외계인" 등에 의한 "crop circle"은 불원간 창조신으로 가장하여 나타나게 되어 있는 인류의 원수 악령들의 대규모 기만 행위의 전단계 포석이다ㅡ모든 인류는 때 늦기 전 시급히 대비하라

모든 교회는 비상 나팔을 일제히 불라ㅡ시급히 총력전 태세를 갖추라


처음부터 우리가 crop circle(크롭 서클 혹은 미스터리 서클-Mystery Circle-이라 불리우는 것으로서 방대한 면젹의 곡물이 일정 방향으로 눕혀져 공중에서 보아야 전체적으로서 완벽한 기하학적 무늬가 만들어진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페루 나즈카-Nazka-평원에 나타나 있는 무늬와 같은 것으로서 비행기를 타고 공중에서 보아야 그 윤곽이 드러난다는 점에서 공통)을 대할 때 이를 만드는 악령들이 인간에게 일종의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꿍꿍이가 있을 것을 간파했는데 아니나다를까 요즘은 그런 코드화한 문자를 보내고 있는 모양이다.

아래 비디오에 나오듯이, 컴퓨터 프로그램 전문가가 그것을 코드 전환하여 알파벳에 맞추어 보았더니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나타났다고 하는 바, "Beware the bearers of false gifts and their broken promises. Much pain but still time. There is good out there. We  oppose deception."으로 되어 있는 이 문장들을 필자가 해석하기로는, "영생의 선물을 준다는 지금까지의 기독교는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거짓된 것이어서 오늘날까지 전쟁과 악의 창궐을 막지 못해 너희가 고통을 당해 왔던 것이 바로 그 증거이니 더 이상 여기에 속지 말라. 그러나 때 늦지는 않다. 우주 공간 저너머의 우리 외계인들은 선한 존재들이니 우리가 구원할 것이다. 우리는 기독교처럼 속이지는 않는다"는 내용이 된다.

그리고 이 비디오는 고대로부터 남겨져 옴으로써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건축물(영국의 스톤 헨지, 이집트의 피라밋 등이 모두 오늘날의 대규모 속임수를 위해 미리부터 준비해 온 악령들의 사전 포석으로 만들어진 것이다)이 나타내는 일정한 수치가 있어 이것들이 한결같이 가리키고 있는 것이 "goddess of all creation"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는 말도 하고 있는데, "창조주 여신(女神)"으로서 다시 말하면 현대에 와서 스스로를 창조신으로 가장하는 사탄의 본격적인 행보임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이 크롭 서클의 완벽한 기하학적 문양도 이 수치대로 정확히 만들어져 있다는 것이다.

놀라운 것은 소위 보수 정통이라고 자처하는 또 과거 어느 정도 그런 실적도 나타냈던 교파가 이제는 세칭 "외계인"을 인정하는 것으로 완전히 돌아서 악령들의 속임수에 넘어가 있다는 사실이다. 실상 놀랄 것은 없다.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은 이들은 예외없이 모두가 넘어가게 되어 있으니까. 대부분의 교역자들은 따라서 소위 "외계인"을 믿고 있는 실정이고 그렇지 않으면 가부간 확정을 못하고 엉거주춤해하고 있는 상황이다. 당연히 이 시점이면 교회마다 성명서를 내든가 기타 방법을 통해 이 소위 "외계인'에 속아 넘어가는 세상을 향하여 경고를 발하고 이 마지막 남은 때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를 지체 없이 믿음으로 구원을 받으라는 메시지를 전달해야 할 것인데 완전히 침묵하고 있는 것이다.

이 비디오도 마치 창조신의 음성을 듣고 선하고 거룩한 창조신을 대하듯이 경건한 음악을 흘려 보내고 있는 것을 보라. 마치 구세주를 맞이하는 것처럼 이 비디오에 나오는 모든 연구가(크롭 서클에 대한)들 모두가 그런 분위기다. 자연계에 속한 인생들은 이들 초자연계에 속한 악령들의 초능력을 당할 재주가 없다는 사실을 재삼, 재사 강조한다. 그들이 선한 척하고 나서면 그들을 악하다고 할 자는 아무도 없는 것이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지 않고는 백이면 백 모두 이 악령들을 반박할 근거를 마련할 능력이 도무지 없기 때문이다.

과학이든 그 어떤 학문이든 지식을 자랑하는 이들일수록 악령들의 이런 고차원의 지식에는 반드시 현혹되어 넘어가게 되어 있다. 왜냐면 자기가 최고 지식인이라는 자부심에서 그 맛에 살아 왔으니까 자기보다 더한 지식인 앞에서는 맥을 못추듯이 자기 지식을 압도하는 지식의 논리 앞에서는 고양이 앞의 쥐일 수밖에 없음은 당연한 결론이기 때문이다. 그런 학문적 지식과는 차원이 다른 '계시에 의한 지식'(딤후 3:7) 가운데 있어야 쉽사리 요동치 않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을 항상 부지런히 탐독해두라는 것인데 이 경고를 모두 흘려 듣고 있다.


이렇게 악령들의 속임수에 넘어가 성경의 하나님을 배척하고 오직 이 외계인의 속임수에 넘어가 창조신을 알게 되었다고 흥분하고 있는 이들은 그런 것을 거짓된 것이라 경고하는 우리들에 대해 당연히 적대적 위치에 설 수밖에 없고 그래서 우리를 "그 수가 몇이 되든지" 다 싹 쓸 듯이 죽이게 될 때(계 13:15), "하나님을 섬기는 예배"(요 16:2)라고 여겨 교회를 말살시키게 될 것이다. 

고로 이 시점에 대비하여 모든 교회는 북한이나 과거 중국이나 소련 체제에서의 교회처럼 세포(cell) 교회로 전환하라는 것이다. 악령들과의 전쟁이 영적인 것이고 육체적이지 않다는 차이는 있으나 싸우는 방법은 같은 것이니 하나의 전투 대형(隊形)을 유지하기에는 그 결속력과 기동성(민첩성), 침투력에서 세포 교회처럼 이상적인 것은 없다. 초대 교회가 바로 그런 유형이었던 것이다. 



따지고 따지고 또 따져라, 왜, 왜, 왜ㅡ이것이 성경이 던져주는 도전장이다

"지하교회"란 말은 어폐가 있다. 초대교회 형태를 벗어나, 이 세상이 마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된 것처럼 교회당 건물을 보란 듯이 크게 짓고 하나님의 교회랍시고 위세를 과시하던 지금까지의 무지한 교회 운영을 기준하여 하는 말이기에 그렇다. 마지막 아담께서 다시 오시기 전까지는 핍박 받는 것으로 시종일관하게 되어 있는 교회의 본래의 사명을 망각한 세속적 표현이므로, 우리는 마땅히 "초대 교회 형태"라고 고쳐 불러야 마땅하다. 아니라면 "세포(cell) 교회"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세포"라는 의미는 핵 분열하듯이 12명을 적정 단위로 하고 그 이상으로 불어나면 반으로 다시 쪼개어 6명 선에서 출발, 계속 그렇게 해서 사람들을 불려 나가는 방법이다.

이렇게 해서 매일 모이고(매일 모이는 것으로 원칙으로 삼고 적절하게 신축성 있게 운영하면 될 것이니 개인 사정을 따라 불가피하게 빠지는 날이 있을 것이므로) 일주 한번은 기백명이든 천명이든 전체가 한 번에 모여(건물이 없을 때는 하루쯤 임차해도 무방할 터) 대집회를 여는 구상도 좋은 것이다. 어쨌든 틀에 박힌 것에 집착하여 화석화(化石化)하는 것을 막도록 힘쓸 일이다. 생명체는 환경에 순응하여 적절히 변화하는 것이 특색이다. 그런 변화가 없으면 목석과 비교해 나을 것이 무엇이랴.

앞 글에서 악령들이 속일 때 "기독교는 지금까지 인류 생활을 향상시키지 못했다. 현재에도 평화와 안녕의 질서를 지키지 못했으니 어찌 미래의 영생의 약속인들 제대로 지킬 것이냐" 식으로 무지한 인생들에게 접근한다 했거니와, 실상 이런 점에서 성경의 가르침을 비판하는 이들이 많은데, 인간 스스로 그렇게 생각한다기보다 악령들이 이런 식으로 성경을 오해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오늘날에 이르러, "내가 바로 구원자다" 하고 나설 준비로써 그런 생각을 광범위하게 인생들의 뇌리 속에 미리 각인시켜 놓았다 함이 옳은 분석일 것이다.

성경은 이 세상에서의 안녕과 복락을 약속한 일이 없다. 이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하는 것이니, "악인에게 평안이 없다"고 성경이 처음부터 선언한 것처럼, 악인 즉 자아중심으로 나가는 인간이든 영물이든 단 하나라도 있을 때 그 사회는 안녕과 질서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면 그 하나가 들어 얼마든지 전체 사회를 온통 흐려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탄 하나가 들어 전체 인간을 죽음에 몰아넣을 뿐 아니라 모든 피조물을 고통 속에(한 몸으로서의 체제이므로) 빠뜨린(롬 8:22) 현재의 예를 들어도 알 수 있지 않은가.

이런 상태에서의 안녕과 평안을 요구한다면 그것은 강제와 간섭에 의한 것일 수밖에 없다. 지금은 악인 혹은 죄인들을 회개시키는 때요 그런 장소(무대)로서의 세상인 것이다. 생명의 핵심이 사랑이 되어 있는 속성상 절대로 강제적 수단으로 평안과 안녕을 보장할 수 없는 일이다. 자진 자발적인 자유인으로서의 선택에 의해 그래서 의와 선(그 총합이 바로 한 몸 체제에서의 삶)을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사수하는 이들로써 구성된 사회라야 자유, 평등, 박애의 이상이 구현되는 것.

그러므로 필연적으로 이 세상에서는 악인이 승승장구하고 득세할 수밖에 구조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의인(선인)은 밀리고 부대끼고 박대를 당하는 것이 필연으로 되어 있다. 성경은 이를 다시 필수적인 것으로 가르친다. 이유는 생명 가운데 있는 의인이 구원의 대상자의 죽음에 동참하여 하나가 되어야만 그의 죽음이 의인의 생명으로 전환될 수 있다는 항구불변의 삶의 법칙(이는 또한 구원의 법칙이니 곧 머리와 몸으로서의 한 몸됨의 이치)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친히 본을 보여주신 바다.

적 그리스도의 거짓된 속임수의 수작은 그런 소위 "외계인"의 메시지 전달에 의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과 같이 강제력에 의한 통일, 통할이다. 그런 강제적인 것은 위의 설명처럼 절대로 용납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고로 이 영원한 삶의 법칙을 애호하여 준수하는 하나님의 의인들은 이 세상에서 사람들을 건져내는 갸륵하고 숭고한 작업에서 모든 고난과 죽음을 각오하고 있기에 악령들이나 악인들의 위협이나 회유가 먹혀 들 수가 없다.

성경 내용의 합리성은 가장 논리적이고 상식적인 것이 총동원되어 있는 것임을 항상 명심할 일이다. 그러기 때문에 진리인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시니까 그런 것이다. 모든 법칙의 창조자이시니까 그런 것이다. 법칙에 모순이나 자가당착이 있다면 그것은 더 이상 법칙일 수 없다. 이런 사실은 외면한 채 그리고 알려고도 않은 채 "무조건 믿는 것이 대수다' 하고 무식하게 가르쳐 온 것이 오늘날까지의 서글픈 실상이었다. 여기서 한시 바삐 탈피할 일이다.

2016년 4월 8일 금요일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를 동시에 의식해야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다"(고후 4:18).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히 11:1)라는 관점에서 말한다면, 자연계와 초자연계의 실상으로 나누어 생각함이 우리에게는 발등에 떨어진 불이다. 눈에 나타나 있는 것만의 세계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동시에 연상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쉽지 않다고 쉬이 포기할 일은 절대로 아니니 우리의 생사와 직결되어 있는 까닭이다.

보이지 않는 용 곧 사탄, 보이지 않는 기타 악령들, 보이지 않는 네피림의 망혼(亡魂)들이 우리와 직접 맞대어 거처하는 오늘의 이 세상인 것이다. 항상 이런 존재들을 우리는 의식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동시에 그들과 맞수가 되어 우리를 보우하고 있는 천사들의 존재도 인식해야 하지만 그들은 우리를 위하는 터이므로 그들보다 우리와 적대 위치에 있는 악령들의 세력을 의식하고 있어야 그에 대한 적절한 대처가 가능하기에 이것이 우리의 주된 관심사이지 않을 수가 없다.

간단히 말해 악령들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도전해오고 있는 것이다. 싸움을 걸어오고 있으므로 우리로서 응분의 조처를 취하는 것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항상 말하지만 우리 인간은 그들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 일방적으로 당하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배후에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 움직이는 거룩한 천사들의 활동이 있는 것이나 천사들의 보우도 우리가 이들 악령과 맞서는 위치에 있어 그에 합당한 자세를 취하지 않는 한 오직 그림의 떡일 뿐임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노도와 같이 홍수처럼 악의 군세(軍勢)가 밀려드는 판인데 이에 맞서는 능력(힘)은 우리의 머리 곧 대장이신 마지막 아담으로서의 사람 예수 그리스도뿐인 것이다. 에덴낙원에서 여자가 남자(아담)와 하나됨을 통해서만 자기보다 모두 상위(上位, 그들보다 여자가 나중에 창조되었으므로)에 있는 여러 영물들 앞에서 자기 존재를 확인할 수 있어 그들 위에 군림할(영물들보다 나중 창조되었다는 열등 의식을 극복하고)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 역시 그러하다. 

항상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우리가 이 전쟁에서 아무 힘도 쓸 수 없고 따라서 존재 의미가 없는 것이다. 우리가 이 세상 살고자 하여 이렇게 이런 육신으로 있는 것은 아니니까. 우리가 구원 받은 것이 현실이고 명실 상부한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있을진대 당연히 천사(영물)들과 같은 초능력의 존재로 악령들 위에 군림해 있어야 하는 것이나, 하나님의 새 창조의 역사에 동참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고난 받음이 필수 조건이므로 이 그리스도의 남으신 고난을 그 몸된 교회의 일원으로서 마저 채우기 위해 세상에 있는 터라 오직 여기에만 우리가 관심을 총 집중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그리스도 의식으로 항상 우리 자신을 가꾸고 다듬고 단련시킬 필요가 있다. 악령들이 단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세상 사람들의 이리저리 휘둘리는 인파에 휩쓸려 부화뇌동 식으로 시간을 보낼 것이 아니라,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다"고 성경이 경고하는 것과 같이 매일의 시간 활용에 관해서도 나의 목적대로 요리하는 주인 의식을 발휘, 그리스도와 함께 일하는,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고후 6:1) 자로서의 마땅한 자세로 시종일관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TV와 같은 눈을 현혹하는 것에 피동적으로 따라 움직일 것이 아니라 필요한 것이 아니면 과감히 차단하는 등의 절제와 통제가 요구되는 것이다.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가지만이라도 족하다"(눅 10:41,42) 하신 대로, 싸우는 "그리스도의 군인"(딤후 2:3,4/빌 2:25/몬 1:2)은 싸워 이기는 것 외에는 관심사가 없다. 고린도전서 7장에 나오는 바 바울 사도의 권고를 충실히 따를 것이 요구된다. 혼자 지내라는 것이 명령이 아닐 뿐, 다른 것은 다 주님의 명령으로 말한 것이다. 혼자 지내는 것은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취하는 것이므로 명령일 수 없으나 "받을 만한 자는 받으라"(마 19:12)고 하셨으니 이에 마땅히 유의할 일이다.

이제까지는 구원만 받으면 그만이라는 그릇된 교리에 젖어 성경 읽는 것과 제사장으로서의 기도를 등한시하였으니 지금부터는 생사가 달린 것으로 인식(왜냐면 불순종일 때 자기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결과가 되어 영원한 운명이 그대로 반영되어 나타날 것이기에), 180도 전향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마 7:21) 정상적인 삶으로 진입할 일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들이 나를 에워싸고 있다. 그들은 나를 적대하는 원수들이지 친구 사이가 아니다. 그들의 관심은 나를 넘어뜨리고 영원한 죽음을 맞도록 하는 그 일에만 맞추어져 있다.

사탄의 시험(눅 4:4)이 바로 이런 뜻이다. 이 시험은 일회성이 아니라(:13) 연속해서 연달아 퍼부어지는 불의 화살들이다(엡 6:16). 전투에서 대장과 대원은 일심동체다. 지휘관의 명령 일하에 하나같이 움직이는 것이 생명이다. 사탄과의 전투에서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한 시도 지탱할 수 없는 나의 위치를 항상 자각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싸움에는 용맹도 용맹이지만 지략 없이는 이길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 바로 그러한 지략의 원천이시다(고전 1:30/사 9:6).

때문에 우리가 "쉬지 말고 기도할"(살전 5:17) 필요가 있기에 그렇게 하라고 성경은 명령하고 있는 것이다. 지휘관의 작전 지시는 부단히 내려진다. 그러나 우리의 지휘관의 지시는 우리가 기도하여 구할 때에 한해서만 내려진다는 이 변함없는 진실을 외면하지 말 것이다. 지시를 수령함이 없이는 마치 낙오병처럼 되어 그 종말은 뻔하다.

최선의 방어는 공격에 있다는 말처럼 자기 믿음을 지키고 구원받음을 계속 유지하는 최선의 방법은 주님과 하나되어 사탄과의 싸움에서 이기는 것이니 곧 "보내심을 받은"(요 20:21,22) 대로 사람들을 건지기 위해 기도하고 말씀 전달하고 삶의 모범을 보여 선한 직업을 가져도 가난한 자 구제를 목적하는(엡 4:28) 생활 자세인 것이다.

어찌하여 세상 살려고 하는가. 이 세상은 사람 사는 데가 아니다. 악마가 지배하는 곳인데 어찌 사람 사는 데인가. 이 시간 후의 일도 보장받지 못하는 자연계의 육체를 가지고 어찌하여 삶의 낙을 누리겠다는 것인가. 전투하는 자가 어찌 평상시의 평화시 생활을 꿈꾸겠는가. 전쟁이 벌어졌으니 어찌하든 이겨놓고 보는 것이요 나머지는 그 다음의 일이다.

이공 순신은 그 7년 전란(임진왜란)에서 한번도 여색(女色)을 가까이하지 않았다. 우리가 이 세상 얼마나 더 버틴다고 적 그리스도 출현까지 7년이나 걸리겠는가. 그 이전에 세상은 급속도로 변해 갈 것이다. 7년이라 하더라도, 단 몇 사람이라도 더 건져야 하겠으니 단 몇 년이라도 전도하고 기도할 수 있는 여유를 더 주십사 하고 눈물로 호소할 일이 아닌가.

21세기 진화론자들과 창조론자들이 서로 화합할 수 있는 접점



"만물이 창조자로 말미암아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골 1:16) 곧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는 것으로서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 이를 우리는 "믿음으로 아는" 것이다(히 11:3). 때문에 인생은 마땅히 보이지 않는 것을 "믿음으로써 모든 일을 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않아야"(고후 5:7) 하는 것이다.

진화론자들은 "보이는 것"을 가지고 "보이는 것"들을 판단하려 하니 오류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즉 자연계에 국한되는 관찰만을 전부라 착각하니 동전의 일면밖에 인식 못하는 우물 안 개구리일 수밖에 없다. 그 나머지 다른 면은 완전히 덮어 둔 채 한 면만을 가지고 지지고 볶고 모든 수단을 다해 전문가가 되어 있으나 다른 일면은 전혀 고려하지 않으니 그 지식이 산 지식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걸림 돌로 작용하는 것은 필연적 운명이다.

성경은 이와 같이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양립된 세계임을 명백히 하고 있다. 오늘날의 자기 도취에 빠져 있는 (자연)과학자들보다 앞서도 한참 앞서 있는 것이다. 생각해보라, 눈에 보이는 일면만을 고집하는 경우, 눈에 보이지 않는 다른 면까지 인식하여 이를 주장하는 이들이 과연 그들의 눈에 어떻게 비치겠는가. 헛소리 하는 미친 사람으로 보일 것이다. 양면만을 다 보는 이들은 또 이 일면만을 보고 고집하는 이들이 헛소리하는 가련한 존재로 보일 것이다. 제3자가 볼 때 둘이 다 똑같다고 하겠는가? 분명히 그 중에 하나는 맞고 나머지는 틀렸다고 하겠는가. 상식인이라면 판단을 후자 쪽으로 할 것이다. 즉 양면을 다 보는 쪽의 손을 들어줄 것이다.

그러면 그 "보이는 않는 것"의 증거를 대라고 할 것이 아닌가. 그런 요구야말로 어폐가 있는 것이니, 보이지 않는데 어떻게 보이는 것으로써 그 보이지 않는 것을 증명하라는 말인가. 이것이 자연계 즉 보이는 것의 한계다. 다른 방도를 찾아야 하는 것이다. 여기에 인간 생애의 법칙으로 검증되는 3위1체의 원리 아니, 둘 모두가 등장하게 되는 필연성이 확인된다. 둘이 함께, "보이지 않는 것"의 실존을 증명하는 것이다. 우리가 사람인데, 이 사람이라는 존재를 마름질하고 재단하고 저울질하고 "너는 여기서 여기까지이고 그 이상은 안된다" 하고 "너는 이로써만 한정되어 있다"는 식으로 인생을 사로잡아 꽉 움켜쥐고 있는 존재가 사람 자신일 리는 없지 않은가.

이렇듯이'인간을 주재, 주장하는 존재를 창조자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인간이 아니라면 별문제인데 인간인 이상 여기서 한 치도 벗어날 수가 없다. 성경이 이러한 하나님의 존재를 처음부터 밝혀, "인생의 걷는 걸음이 걷는 자 자신에게 있지 않다"고 선언하고 있는 이상 더욱 그렇다(렘 10:23). 모든 인류를 그 생존의 때와 장소를 따라 한정하셨다 또는 미리 정하셨다 한 것이다(행 17:26). 이 사실이 가시적으로 명명백백하게 드러나 있는 것이 인간 생애의 법칙(3운법칙)인 것이다. "너는 언제부터 언제까지만 살아라", 그리고 "언제부터 언제까지만 네 활개를 펼 수 있고 이 때를 넘기면 더 이상 움직이면 안된다" 이렇게 정해진 대로 인간사 그리고 우주의 만사가 진행되는 것이다.

바벨론 왕 궁전 벽에 한 손이 나타나 쓴 글씨를 문득 보고는 창자가 녹는 듯이 되어버린 벨사살 왕 앞에 선 다니엘이 밝힌 사실이 그것이다. "왕의 호흡을 주장하시고 왕의 모든 길을 작정하시는 하나님"(단 5:23)이심을 밝힌 것. 신지식, 첨단 정보에 목말라 하는 당시의 문명인들이었던 아테네 시민들 앞에서 바울 사도가 밝힌 사실 역시 동일하다. "우리가 그(창조자 하나님)를 힘입어 살며 기동(起動, 움직임)하며 존재한다"(행 17:28)이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만물이 지어졌는데"(히 11:3) 이 역시 우리를 기준으로 하여 착각할 것이 아니니, 우리는 그냥 말 한 마디로 "돈 나오라 뚝딱, 밥 나와라 뚝딱" 식으로 이해하기 쉬우나 말씀이 일단 발해지시면 즉 "빛이 있으라" 한번 말씀을 하시면 자연계의 모든 것이 빛이 존재하게 되는 쪽으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 기간이 당장인지 세월을 두고 소위 "진화"를 통해 진척된 것인지는 성경이 밝히지 않았으니 우리가 함부로 말함으로써 가감할 필요는 없는 것.

"뭍은 한 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과목을 내라", "물들은 생물로 번성케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등등이 모두 그러하다. 그래서 그 "말씀을 이루는" 과정에서 물고기가 새로, 새가 네 발 가진 짐승으로, 또 인간으로 변천해 간 것이다. 이러한 과정의 족적(발자취)이 화석으로 남아 있을 확률은 100퍼센트다. 우리가 분명히 알거니와 "6일 창조'의 그 "1일" 단위는 우리가 아는 대로의 365일 24시간의 1일이 아닌 것이니 왜냐면 사계절이 정해지기도 전에 이미 하루 이틀 세어 가기 시작한 때문이다. '

단 한 가지 알아야 하는 것은 그런 진화의 과정에 의한 창조는 이미 "7일"로써 완전히 마감되었고 더 이상 진행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창조론적 진화론이니 진화론적 창조론이니 하는 말부터가 역시 어폐가 있다. 오직 인간의 신 창조만이 지금 진행 중일 따름이다. 처음 초자연게 초능력의 존재로 창조되었으나 범죄하여 현재와 같은 비극의 자연계 존재가 되어 있어 이런 망가진 인간을 마지막 아담으로 말미암는(첫 사람 아담의 역할은 폐기되었으므로) 재 출생을 통해 새로 창조하심이다. 이 인간의 새 창조로써 새 하늘과 쌔 땅의 시대가 도래하는 것이다.

"기독교계가 그렇게도 모를 리 있는가, 충분히 이유가 있을 것이 아닌가"ㅡ그렇다, 이유가 있고도 남는다



하기야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도 15세기의 일이다. 그러면 기록상으로는 인간이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그 때까지만 해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는 참으로 한심한 얘기가 된다. 이런 세상 일에 대해서도 무지하기가 이 정도라면 하물며 보이지 않는 초자연계(신령한) 일을 말하는 성경에 대한 무지야 말해서 무엇하랴.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 친히 계시하심으로써 인간이 알게 된다고 성경이 선언한 것이야 사실이지만(고전 2:12-14), 그러나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시므로 그 구원의 말씀이 성경으로 기록되게 하신 이상 필요한 모든 것은 인간에게 숨김 없이 다 나타내시는 것도 사실이지만, 말씀하셔도 믿지 않으면 그만이요 더군다나 두드리고 찾고 구하는 자에게 진리가 열려진다고 확언하신 다음에야 무슨 말을 하리요.

다시 말해 두드리지 않는 한 수천년이 아니라 수만년을 간다 한들 무지몽매 속에 갇혀 있을 수밖에 없기는 마찬가지다. 더군다나 사람들이 성령으로 계시하여 주심을 바라 성경을 읽는 대신 인간의 말과 글에 의존하여 학문적으로만 접근하려는 마당에서야 더 말해 무엇하랴. 그러므로 기됵교 교리가 성경에 상당 부분 어긋나 있는 현실에 당황해하거나 어떤 종류든 회의에 빠질 필요는 없는 것이다. 오히려 당연지사로 여겨야 할 일이다.

그리고 신대륙 발견 이야기가 나와서 말이지만, 아담 이후 인류가 바다 저너머에 낭떠러지가 있다는 미신에 사로잡혀 있게 된 이유가 있으니 다시 말해 지구가 둥글다는 진실에 일찍이 눈뜨지 못했던 것은 사탄 곧 용(龍)이 그렇게 인간의 인식이 그 정도로만 되도록 한정시켜 놓았다 해도 하자는 없을 것이다. 왜냐면 바다는 용이 그 몸을 숨기면서 즉 인간의 눈에 띄지 않도록 하면서 활동할 수 있는 유일의 무대이기 때문에 그와 같은 무지와 미신 속에서 한동안 가두어 두었다는 설명이 됨이다. "미신"이란 것은 바다에는 무서운 용이 우글거리고 있다고 믿어 감히 바다 깊숙이 들어가는 것을 꺼려했다는 사실을 말함이다. 용의 실체는 사실이나 사탄이 아닌 별개의 기괴한 생물이 살았다는 것으로 믿게 만들었으므로 "미신"이라 한 것이다. 1908년 시베리아 퉁구스 사건 참조.

그러나 알고보면 그런 용에 관한 것이나 또는 귀신을 섬기고 귀신의 조종을 받고 행해지는 무속과 같은 것이 이제는 "미신"으로 취급될 수 없는 시대로 접어든 것이니 그 정체가 실제로 파악되고 있는 까닭이다. 즉 악령들의 소행이라는 것이다. 용도 이제는 그 정체가 드러내어지고 있는 터라(사탄 자신은 또 어떤 거짓말과 속임수로 이 사실을 얼버무려 변명을 만들어낼지 모르나) 과거와는 사뭇 다른 시대가 되어 있다.  


요컨대 이 세상 신 사탄이, 적수로서는 상대가 되지 않는 인생들을 좌우지함으로써 눈가리개로 막아놓고 보지 못하게 하면(고후 4:4/행 26:18) 천하없어도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다는 데에 있으니, "과연 그럴 정도로 모를 수 있을까" 하고 의아해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기독교계가 지금까지 그렇게 인식해 온 데에는 충분히 그 이유가 있을 것이 아닌가"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유야 충분히 있고도 남으니 다름아니라 사탄이 눈을 가려 보지 못하도록 막아놓았기 때문이다. 인생들의 수효가 지금보다 천 배 만 배가 된다 해도 한 사람같이 조종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이다. 천만년 가도 모를 수밖에 없다. 이를 다시 강조하는 것이다. 

2016년 4월 7일 목요일

3운법칙의 경이(驚異)ㅡ그 세 가지 예


인간 생애의 법칙(the law governing human life) 즉 3운(運)법칙ㅡ알기 쉽게 통속적인 명칭으로는 세계적으로 통할 수 있는 일관성을 위해 trinihomo, fasomo, fas homo, homorhythm이라고도 하지만ㅡ은 흥하고 망하는 또는 전성기와 침체기로 나누는 것이라기보다(물론 대체적으로 그러하나) 각자의 그 인간됨을 논하고 있음에 우리는 경탄을 자아 내는 것이다. 누차 소개해 왔지만 다시 3가지만 예를 든다면 효봉 선사(曉峰禪師)의 생애가 그렇고 스웨덴의 오페라 여가수 제니 린드(Jenny Lind)가 그러하고 영국 웨일즈 현상의(세상이 소위 "Wales Revival"이라 부르는)의 이반 로버츠(Evan Roberts)가 그러하다.

로버츠의 경우 그 생애가 속 빈 강정 다시 말해 겉치레만 번드레하게 나타나고 실속은 없는 속임수라는 것을 그 생애가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물론 당자 자신은 그 생애를 성령의 역사(役事)로 보지 그 생애가 악령에 의해 조종된 것이라 생각할 리 없다. 본인만 아니라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성령의 부흥 운동"이라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이 모두 그를 하나님의 성령의 사역자(事役者)라고 보지만 3운법칙만은 아니라고 단정 짓고 그 생애를 그리고 있으니 어느 누가 놀라지 않으리요. 바로 여기에 3운법칙의 막강한 위력과 권위가 발산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사람은 그렇게 판단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보시지 않는다 즉 "너희 인생들은 잘못 알고 있다"고 훈계하시는 것이다. 하나님 친히 인간을 정확히 통제하시고 조절하시는 것이 이 3운법칙이라고 결론 내릴 수밖에 없다. 이는 이미 누누이 밝혔지만 인간의 자유 의지 간섭이나 강제와는 별개다. 다시 말해 로버츠의 소위 "교회 부흥"은 속임수요 사이비인 것이다. 오늘날 모든 사람이 그의 활동을 "성령의 역사(役事)"라고 보지만 그렇지 않다. 간단히 말해, 로버츠는 그렇게 전국 아니, 세계적으로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킨 뒤 신경 쇠약이라는 의사의 진단과 권고를 받고 그 무대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다가 1925년과 30년 사이에 간헐적으로 교회 설교 강단에 잠시 섰다가 그 후로는 아주 퇴장해 버린다. 그림에서 보듯이 1906년에서 25년까지 20년간은 아주 침묵 속에 일관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엮어지는 27년(1903-30)간이 바로 로버츠의 LP이다. 이러한 내용을 모르고는 그의 LP, DP가 셈해지지 않는다는 데에 키포인트가 있다. 다시 말해 그가 일약 세계적으로(개신교계에서) 이름을 떨친 명성이 허구라는 것이다. 그의 3운법칙 도표가 명확하게 그림을 그리듯이 설정해놓고 있는 그대로다. 그 LP 안에 아무 내용이 없이 텅 비어 있음과 같다.

왜 그가 사이비라고 단정 짓는가 하면 위에서 지적한 그대로다. 즉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그런 기적적인 것을 나타내었다면 신경성 발작에 영향 받을 이유가 천하에 없는 것이다. 성경 책장을 넘기다가도 그런 발작이 일어났다고 되어 있다. 이것은 순전히 귀신 들린 다음의 짓거리일 뿐이다. 이런 측면에서는 거룩한 맛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없다. 그러면 왜 그런 놀라운 교회 내 상황이 벌어졌는가 하겠는데 그야 악령은 얼마든지 그런 인간 조종을 할 수 있는 터이다.

수많은 청중이 일사불란하게 기도를 하는가 하면 다음 순간에는 하나같이 목청을 돋우어 찬송을 부르기도 하는 등 완전히 분위기가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사로잡혀 좌지우지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 정도로 신비한 것이면 무조건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믿는 데에 인간의 맹점이 있다. 더군다나 하나님 찾고 예수 그리스도를 들먹이고 성령을 말하는 분위기에서는 모두가 그렇게 착각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이와 같이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진위는 나타나게 되어 있다. 로버츠의 3운법칙 도표가 그렇게 나타나서 그의 활동을 사이비로 연결시키는 것이 아니라, 위에 지적한 일련의 사태는 그런 판단을 내리기에 충분한 근거가 되는 것이다.

만약 그런 것이 성령의 역사라 규정 짓는다면 누가 즐거이 성령의 역사를 찾고 구하겠는가. 신경쇠약에 걸린다는 것부터가 언어도단이다. 오히려 그런 기미가 나타나면 하나님의 능력으로 벌써 치유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인간의 의술에 힘입어 그 의학적 처방으로 두문불출했으니 인간의 힘이 하나님의 능력보다 우세하다는 결론이 아닌가. 문제는 이러한 맹점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여전히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 맹신하고 있는 현실이니 얼마나 허망한가. 

이런 것도 구분해낼 수 있는 분별력도 없다는 말이 아닌가. 무조건 초자연적 초능력이라면 죽는 시늉이라도 서슴지 않는 한심한 작태다. 때문에 오늘날 "성령의 역사"라는 미명 아래 속임수로 일관하는 악령들의 기세가 날로 승승장구하는 것이다. 이 이반 로버츠(Evan Roberts)의 생애 분석은 오늘날 자행되는 소위 "성령이 역사"에 대한 하나님이 주시는 경고가 된다. 이 이반 로버츠 현상으로부터 시작하여 오늘날의 소위 오순절 운동(방언, 신유 등으로 특징을 삼는)이 시작된 것이다.  




다른 예는 효봉과 제니 린드다. 둘 다 같은 내용의 유형으로서 이미 여러 글에서 설명했거니와 일반적인 인간의 관점과의 현격한 차이를 드러낸다. 사람이 보는 눈에서는 효봉 선사의 경우 화려한 판사 재직을 그 활동기 즉 LP로 꼽는 데에 이의가 없을 것이나, 그의 3운법칙 즉 trinihomo는 그가 산사에 입문하여 승려가 되는 때를 포함시키지도 않고 그 이전 판사직을 내동이치고 엿장수 행세로 전국을 방랑하기 시작하던 때를 LP의 출발점으로 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trinihomo상으로 판단하면 그의 인물됨은 판사도 물론 아니고 승려생활도 아니고 오직 인생 자체에 대한 회의를 절감하기 시작하여 결단을 내리던(판사직 사퇴) 한 "고뇌하는 인간"으로서의 위상으로서만 그려내는 것이다. 이런 관점은 위의 이반 로버츠와 같은 것으로서 전혀 인간다운 것이 아니다. 하나님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될 수 없는 현상이다.



스웨덴의 오페라 가수 제니 린드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의 LP는 화려한 무대에서 천부적인 미려한 목소리를 한껏 자랑하여 펼치던 가수로서의 역정(歷程)은 하나도 포함시키지 않고 있다. 린드는 당대 최고의 가수여서 명성과 함께 돈더미 위에 올라 앉았고 그 엄청난 부로써 자선 사업을 했기 때문에 더욱 인기가 높았다. 그럼에도 그 무대 생활은 그의 LP에 포함되지 않은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고이 간직하기 위해 세상의 모든 부귀영화를 단숨에 떨쳐 버린 역사의 인물로 그의 trinihomo는 정확한 평가를 내리고 있는 것이다. 이런 것이 그 누구도 감히 범할 수 없는 3운법칙의 독보적인 위상(位相)이다. 그 외의 인물은 지금까지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많이 분석하지 않아 기백명에 불과하지만) 이만한 주목을 받는 예가 없어 이 정도 소개로 마무리할 수밖에 없다. 앞으로 혹 여유가 있어 생애 분석 중에 이런 비슷한 사례가 발견될 때에는 지체 없이 소개할 작정으로 있다. 

3운법칙은 3위1체의 원리(the universal law, the law of Trinity)를 검증하고 있다. 3위1체의 법칙은 모든 법칙과 원리의 모태(母胎)인 것이다. 

지금까지 세상에 알려진 대로의 기독교 교리의 심각한 오류



기독교라고 하면 가장 큰 교단으로서 세력화되어 있는 천주교 그 다음으로는 개신교인데 이를 총칭하는 것으로 세상은 인식하므로 그대로 따라서 여기서도 기독교라 한다. 여기서 "오류"라고 하는 것은 오직 성경상으로 밝혀진 사실을 따라 밝히는 것으로서 성경과 어긋나는 것 중의 가장 두드러진 것을 열거함이다.

★ 천주교도 개신교도 에덴 동산을 자연계에 속한 동산 쯤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초자연계임을 밝힌 것이다.
★ 따라서 아담이 우리와 같은 자연계에 속한 몸으로 있다가 에덴 낙원에서 추방된 것으로 기독교는 알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에덴 동산이 초자연계이니까 당연히 초자연계 몸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 고로 아담 부부가 직면한 죽음은 그런 영원히 사는 초자연계(성경에서는 "초자연"이라는 말 대신 이를 "신령함"으로써 표현) 육체의 삶을 잃고 자연계 존재로 하락한 것을 성경은 밝히고 있는데 반해, 기독교는 이런 사실을 모르니까 단지 "하나님과의 영적(靈的) 단절" 정도로만 애매 모호하게 얼버무려 왔다.

★ 때문에 기독교는 천사나 사탄(마귀, satan)을, 성경 중에 나오는 "그룹"이나 "스랍"으로 표현되고 있는 피조물 중 하나인 그룹이었다고 알고 있는 반면, 성경은 "큰 용, 옛 뱀 곧 마귀"(계 12:9/20:2)로서 창세기에 나오는 그 "뱀"이라고 두 번이나 명시해주고 있다. 기독교는 이를 무시한 것이다.

이와 같이 가장 기본이 되는 것부터 간과해 버린 것이 오늘날의 기독교다. 초대교회 사도들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건만 그 후 몇 백년 내려오면서 중간에 변질된 결과다. 그것이 오늘날까지 방치되어 온 것이다. 그 후로 이에 대한 "재검토", "재해석"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성경을 직접 읽기보다 소위 교부(敎父)들의 글만을 위주로 하여 학문적으로 접근했기 때문이다. 계시로써만 구원의 진리를 알 수 있다는 성경의 경고(고전 2:14/눅 10:22)를 처음부터 완전히 무시한 결과다.

유대인들이 인식하고 있는 그 수준을 따라서만 성경을 이해하려 한 불찰이다. 유대인의 교리나 인식이 무슨 최고 권위처럼 착각하는 것부터가 잘못이다. 그리스도 오시기 전에는 아무도 보다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것을 알도록 되어 있지 않았다. 단지 그림자에 불과한 그동안까지의 지식이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써 모든 것은 밝혀진 것이다. 에덴낙원이 초자연계라는 사실도 물론이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밝히심으로써 알게 된 사실인데 그 가르치심을 수용하지 않는 유대인 사회이니 그들의 믿는 바가 전연 참신한 것일 수가 없다. 그럼에도 그들의 것이 무슨 최고 권위인 것처럼 착각해온 것이다.

이와 같이 기본부터 틀려 버리니 한 가지를 보면 열 가지를 안다고 그 나머지 모두가 뒤틀리게 될 것은 물론이다. 소위 "첫 단추 잘못 채움"이다. 그래서 나오게 되는 것이 성경과는 판이한 구원관이다. 즉 아래와 같다.

★ 그 결과 천주교는 마리아를 끌어들였다. 마리아를 통해서 그리스도께 나아간다는 논리다. 마리아는 "마지막 아담"(고전 15:45)께서 그 제자들이 듣는 앞에서 어머니라고도 하시지 않고 "여자"라고만 호칭하셨던 그런 존재다. 요한 사도는 이 사실을 두 번이나 명백히 기술해놓았다.

그리스도 위에 마리아를 얹어 놓았을 때에는 거기서 그 어떤 성경적 구원관도 도출해내는 것은 불가능이다. 그래서 이 한 가지로써 천주교는 완전히 논의의 대상이 되지 못하므로 배제한다.

★ 개신교의 그릇된 구원관은 쉽게 말해 "행위"보다 "믿음"에 아주 경도되어 버린 것이다. 행위와 믿음은 서로 양립하는 것이 아니다. 믿음의 당연 귀결로서의 행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 당연한 믿음의 증거로서의 행위를 생략해버린 것이다.

★ 그래서 그리스도께 나오기 전의 율법 아래 놓인 상태를 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바울 사도의 설명을 난데없는 바울 사도 자신의 믿은 이후의 개인적 체험으로 둔갑시켜 가르쳐 온 것이다. 개신교의 모든 교단이 이 점에서는 대동소이하고 개별적으로 그런 오류에 물들어 있지 않은 예는 있으나 극소수다. 고린도전서 7장에 머물러야 하는데 그와는 정반대인 로마서 7장에 붙들려 매여 있으니 그 결과는 뻔하다. 흐르는 물이 되지 않고 고여 썩은 물이 되는 것이다. 

★ 여기서, "한 번 구원 얻었으니 영원히 구원 얻은 것"(Once saved, always saved)이라는 오류가 다시 파생된다. 그리고 극단적 낭설에 불과한 칼빈주의가 대두된다. 즉 우리가 믿는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믿도록 정해놓으셨기 때문에 믿게 된다는 가히 '마리아' 수준의 궤변이다. 각자 스스로 자기 의지로 선택하여 믿게 되는 것을 미리 아시는 고로 이 미리 아심을 따라 예정하신다는 성경의 설명을 완전 무시한 것이다. 예정은 이 미리 아신 대로 믿음을 유지할 수 있도록 모든 장애를 제거해 주신다는 의미일 뿐이다. 인간의 자유 의지 간섭이 아니다. 이런 모순점이 명백함에도 불구하고 우직하게 칼빈의 예정론을 중시해 온 어리석음이다.

회개는 차후부터는 영원히 순종하겠다는 약속이다. 이 약속을 액면대로 받으시고 성령의 선물을 주심이다. 여전히 죄를 지을 수 있음에도 무조건 그리스도의 속죄 사실만을 근거로 하여 주시는 선물이라고 거의 모든 개신교는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약속 이행이 되지 않을 때는 그는 아무리 성령을 받아도 도태될 수밖에 없다고 경고하는 것이 성경인데도 개신교는 이런 경고(빌 2:12 등)를 강단에서 말하는 법이 없다.

이런 오류가 지배해 왔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을 얻는 데에는 아무 하자가 없었음을 부기해둔다. 이유는 구원 받는 일은 "돌이켜 어린 아이 같이 되는 자"에게만 해당되기 때문이다. "어린 아이"들은 사랑의 언어만 이해하는 것으로 그 특징을 삼는 것으로서, 이 "사랑"이 모든 지식(그것이 옳은 것이든 그른 것이든 불문하고)에 우선하기 때문에 사랑하여 순종하는 것으로 일관하는 고로 이런 "오류"에 걸려 넘어지는 일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단지 이런 오류는 이와 같은 사랑으로 접근하지 않는 모든 이들을 악인(자아중심을 회개하지 않으니까 악인)으로 분류하여 걸러내는 역할만을 한 것이고, 구원 받는 일에는 아무 지장이 될 수 없었음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상과 같이 지적해두었으므로 성경을 읽는 이라면 이해하는 데에 아무 지장이 없을 것으로 판단되지만 그래도 사족을 붙인다면, 창세기의 에덴 낙원이 초자연계라는 사실 등은 아래와 같은 성경의 설명으로써 명백해지는 것이다. 그 중 몇 가지만 추려서 말하면ㅡ

◆ 창세기 기록에서 사람을 흙으로 그 육체를 만드시고 영혼을 조성하시고 하는 등의 일련의 사실은 창조 기간이다. 창조를 하시는 중인데 이미 창조를 완결하신 자연계를 또 다시 만드실 이유가 없는데도 이 사실을 간과하는 것이다. 에덴 낙원에서 식물을 조성하시고 동물을 만드셨다고 되어 있지 않은가.

◆ 로마서에서 바울은 인간이 죄를 지음으로 죽음이 왔다고 했다(롬 5:12). 그렇다면 아담이 범죄하지 않았다면 지금까지 살아 있다는 말인즉 자연계 몸이 지금까지 살 수 있겠는가. 천년 가까이가 최장 기록임을 성경은 밝히고 있지 않는가.
◆ 자연계 식물이 선악을 알게 하고 더더군다나 사람으로 하여금 영생하게 할 수 있는가. 생명과 나무가 바로 그런 식물이므로 이로써 에덴동산이 초자연계임을 설명하고 있지 않는가.

◆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인자(人子)이심을 거의 말씀마다 강조하셨듯이, 사람이셨다. 그래서 사람으로서 죽으셨고 부활도 사람으로서 이루셨기 때문에 사람된 우리들에게도 부활의 희망이 있는 것이거늘, 그리스도의 초자연계 몸의 부활을 마치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그렇게 되신 줄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위의 바울의 지적한 바와도 같은 의미다.
즉 죄 값이 청산된 다음의 부활일진대 범죄 전 상태 다시 말해 죽지 않는 상태로(범죄의 대가로 우리가 죽는 몸이니까) 복귀하는 의미일 수밖에 없다. 죽지 않는 몸인즉 이 자연계 몸이어서는 안되고 초자연계 몸이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다시 말해 죽기 전 아담의 몸이 초자연계 몸이었다는 증거다. 이런 논리적 파악도 제대로 못한다면 어떻게 성경의 다른 대목은 제대로 파악하고 있다고 자부하려는가.

◆ 뱀이 사람의 말을 한다고 많은 사람이 성경이 동화 같은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꼬아 왔다. 이 모두 치명적인 기독교 교리의 오류가 낳은 부산물이다. 그릇된 해석과 잘못된 이해로써 세상에다 대고 성경을 이렇게 선전해 온 꼴이 되어버렸다. 성경이 두 번씩이나 뱀은 그 용이요 사탄이라 설명한 것을 도무지 듣지 않고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은 고집 때문이다.

◆ 창조를 성경대로의 "6일"로 한정해서 이해해 온 오류 또한 크다. 스랍과 그룹 창조에 대해서 왜 성경이 생략해 놓은 것인지 그 이유를 알아보려고도 않은 것이다. 천사들을 그룹과 스랍 종류의 피조물과 혼동한 결과다. 왜 물이 처음부터 존재했고('6일' 창조가 시작되기도 전에) 그 물 속에 뭍이 들어 있었는지 설명하는 것을 성경이 생략하고 있는지 그 이유를 알려고도 하지 않은 것이다.

◆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것은 우리가 아는 대로의 하늘과 땅을 가리킴이다. 우리가 처해 있는 자연계 환경을 따라 성경은 서술하고 있기 때문에 아담 부부가 "벗었으나 부끄러운 줄 몰랐다"는 표현도 가능한 것이다. 성경은 구질구질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그대로 받아 들이면 인간 이성으로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 단 첨언해 둔다면, 하나님의 일은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으면 알 수 없다고 했으니 그 점은 참작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가만히 있어도 알아지는 것이 아니라 친히 약속해 주신 대로 "찾고 구하고 두드려야" 하는 것이다. 

◆ 성경의 가르침을 이같이 무시 또는 그 결과로 무지함으로 일관한 까닭에 이 세상이 악령 사탄의 지배 아래 있다는 성경의 설명도(고후 4:4/요일 5:19) 귀 담아 듣지 않고 하나님은 창조자이시니까 무조건 이 세상은 하나님이 주재하신다고 일방적으로 생각하여 사탄의 인간 조종을 과소 평가해 온 것이다. 때문에 교회당은 웅장 화려하게 지어 올리는 것이 무슨 큰 영광이나 되는 것처럼 여기고 세상 국권(國權) 위에 소위 "신권(神權)"을 올려놓는 것을 당연지사처럼 착각해온 것이다.

◆ 산다는 것 자체부터 몰이해로 일관해온 것이다. 사니까 그저 사는 것으로만 극히 안일하게 또는 유치하게 생각해온 것이다. 성경이 한 몸 체제를 강조하여 머리와 몸의 관계임을 설명하고 있어도(고전 12:26/대하 13:12) 이를 아랑곳하지 않고 이해하려 하지 않은 것이다. 단지 영생 하나에만 욕심스럽게 매달린 결과다.

이 모두 기본 사실부터 바로 챙기지 못함에서 오는 것이다. 사랑 아닌 지식으로만 달려드는 판이니 제대로 성경 이해에 근접할 수가 없는 것이다. 교회관, 구원관, 인생관(사는 것이 무엇이냐) 모두 혁신적으로 바꾸어야 하는 때이다. 더 이상 어두움 속에 갇혀 지낼 일이 아니다. 속임수에 넘어가 있던 소위 '전통'과 '권위'가 무슨 대수랴. "속았다'는 이 한 마디면 족하고 가차없이 버릴 것뿐이다. 

수 천년의 관록이라 해도 우리의 자연계 수명이 너무나 짧아 그렇지 불과 하루 이틀의 단위인 것이다. 바로 이 기준을 따라 "주님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 하는 것이다. 이상은 대충 큰 것만을 골라 성경과 현 기독교 교리의 차이를 구별해 놓은 것이다. 이런 점만 보아도 대강 실상을 알 수 있으니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각자 판단하여 진리를 따라 행해야 할 것이다. 

하기야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도 15세기의 일이다. 그러면 기록상으로는 인간이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그 때까지만 해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는 참으로 한심한 얘기가 된다. 이런 세상 일에 대해서도 무지하기가 이 정도라면 하물며 보이지 않는 초자연계(신령한) 일을 말하는 성경에 대한 무지야 말해서 무엇하랴.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 친히 계시하심으로써 인간이 알게 된다고 성경이 선언한 것이야 사실이지만(고전 2:12-14), 그러나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시므로 그 구원의 말씀이 성경으로 기록되게 하신 이상 필요한 모든 것은 인간에게 숨김 없이 다 나타내시는 것도 사실이지만, 말씀하셔도 믿지 않으면 그만이요 더군다나 두드리고 찾고 구하는 자에게 진리가 열려진다고 확언하신 다음에야 무슨 말을 하리요. 

다시 말해 두드리지 않는 한 수천년이 아니라 수만년을 간다 한들 무지몽매 속에 갇혀 있을 수밖에 없기는 마찬가지다. 더군다나 사람들이 성령으로 계시하여 주심을 바라 성경을 읽는 대신 인간의 말과 글에 의존하여 학문적으로만 접근하려는 마당에서야 더 말해 무엇하랴. 그러므로 기됵교 교리가 성경에 상당 부분 어긋나 있는 현실에 당황해하거나 어떤 종류든 회의에 빠질 필요는 없는 것이다. 오히려 당연지사로 여겨야 할 일이다. 

그리고 신대륙 발견 이야기가 나와서 말이지만, 아담 이후 인류가 바다 저너머에 낭떠러지가 있다는 미신에 사로잡혀 있게 된 이유가 있으니 다시 말해 지구가 둥글다는 진실에 일찍이 눈뜨지 못했던 것은 사탄 곧 용(龍)이 그렇게 인간의 인식이 그 정도로만 되도록 한정시켜 놓았다 해도 하자는 없을 것이다. 왜냐면 바다는 용이 그 몸을 숨기면서 즉 인간의 눈에 띄지 않도록 하면서 활동할 수 있는 유일의 무대이기 때문에 그와 같은 무지와 미신 속에서 한동안 가두어 두었다는 설명이 된다. "미신"이란 것은 바다에는 무서운 용이 우글거리고 있다고 믿어 감히 바다 깊숙이 들어가는 것을 꺼려했다는 사실을 말함이다. 용의 실체는 사실이나 사탄이 아닌 별개의 기괴한 생물이 살았다는 것으로 믿게 만들었으므로 "미신"이라 한 것이다. 1908년 시베리아 퉁구스 사건 참조

그러나 알고보면 그런 용에 관한 것이나 또는 귀신을 섬기고 귀신의 조종을 받고 행해지는 무속과 같은 것이 이제는 "미신"으로 취급될 수 없는 시대로 접어든 것이니 그 정체가 실제로 파악되고 있는 까닭이다. 즉 악령들의 소행이라는 것이다. 용도 이제는 그 정체가 드러내어지고 있는 터라(사탄 자신은 또 어떤 거짓말과 속임수로 이 사실을 얼버무려 변명을 만들어낼지 모르나) 과거와는 사뭇 다른 시대가 되어 있다.   

  

2016년 4월 6일 수요일

인류사는 대규모의 기만사 (끝)


위의 "하나님이 살아 있는 확실한 증거"라는 동영상 조회수가 240만을 육박하고 있다. 이들이 창조자 하나님의 실존을 알기 위한 일반인들의 구도심을 나타내는 것이면 바람직하지만, 실제는 교회에는 나가나 정말 성경이 진실인지 아닌지 확신이 가지 않는 이들이 조회를 한 것으로 판단되므로, 너무나 서글픈 현실이라 할 수 있다. 무신론자들은 처음부터 막무가내의 자기 고집으로 일관하는 성격이라 이런 것은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는 법이다. 어중이떠중이까지 합쳐 한국의 기독교도가 1,200만이라 자랑하지만, 그 중에 240만이나 되는 이들이 이 비디오를 보았다 하니 그 실상(확신도 없이 교회에 출석만 하는 또는 회의적인 자세를 해결하지 못하는)을 알 만한 것으로서, 그래서 한심하다 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들이 이런 동영상을 통해 이제는 하나님 계심을 알았으니 천국 가고 영원한 형벌을 면할 것인가 하면 그렇지 않다.

성경의 말씀대로 살아야, 회개해야 하는 것이다. 당시 유대인들로 말하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들은 하나도 없었다. 성경(구약)도 다 믿고 의심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세상에 임하신 하나님의 아들은 배척한 것을 보라. 마찬가지로 오늘날도 그렇다. 3위1체의 원리와 3운법칙(인간 생애의 법칙)은 그런 "하나님 증명"을 위해 세상에 알려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 것은 물론 기본이고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자기 부인(마 16:24), 매일 십자가 짐(눅 9:23), 세상을 사랑하지 않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생명)을 미워하는 것(요 12:25)에 착념함이니, 다시 말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지 않으면 아무리 믿음 좋아 귀신도 한 때 쫓아내고 능력도 행하고 하나님 말씀을 전파하는 선지자로서의 임무를 하고 있어도 천국에는 들어가지 못함을(마 7:21) 확인시켜 줌에 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냐. 먼저, 자기 부인이나 십자가 짐을 오해하여 나 자신의 구원을 이루기 위함이 목적이라 착각한다면 구원의 "구"자(字)도 모르는 것임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구원을 이미 받았는데 무슨 또 구원이라는 말인가.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자신의 구원을 이루라"(빌 2:12)는 것도, 구원을 받았으니 즉 죽은 자가 산 자가 되어 있으니 마땅히 산 자처럼 행동하라는 그런 의미요 경고이다. 단 이는 선택 사항이 아니라 필수라는 의미만 명심해두어야 하는 것. 3위1체 원리에서의 양면성과 동시성이다. 일방적으로 되지 않는다. 구원도 마찬가지이니, 갑이 을을 사랑하면 을도 갑을 사랑해야지 갑 혼자만 을을 사랑한다고 사랑이 성립되지 않는다. 그래서 사랑으로써 역사하게 되어 있는 믿음이다(갈 5:6).

하나님의 뜻은 당연히 이 사랑에 있다. 머리에 대한 몸(의 각 지체)의 사랑. 몸에 대한 머리의 사랑의 작용에 대한 무반응이 아닌 당연한 반작용. 그래서 믿을 때 회개하는 것이요 회개한 자에게만 죄 용서가 되고 죄 용서가 된 깨끗한 바탕 위에서만 성령께서 임하심이다. 회개는 이러한 갑의 사랑에 대한 을의 되갚는 사랑으로서, 머리되신 주인님(나를 소유하시는, 왜냐면 주인님 친히 나의 소유가 되어 주셨고 사랑의 종 노릇을 하고 계시니)께 그 소유(물)로서 그 종으로서 오로지 순종하겠다는 나의 약속인 것이다. 그래서 이 약속 이행인 것이다. 이것이 자기부인, 매일 십자가 짐의 의미이다.

바꾸어 말해 모든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 곧 첫째 하나님을 마음과 뜻과 정성과 힘을 다해 사랑함, 둘째는 이렇게 공동의 머리로 모시고 있어 그 몸의 각 지체가 되어 있는 내 이웃 곧 믿음의 형제(우리말로도 "형제"들이라 하면 "자매"들도 모두 아우르는 의미)들을 나 자신처럼 사랑함이다. 나 자신과 같이 위함은, 그들 모두가 거대한, 확장, 확충된 나 자신이 되어 있음이다. 이것이 한 몸됨의 실상이다. 머리도 내 것이니 그리스도 친히 나의 소유이시다. 친히 그 자신을 내게 주심을 나 위한 십자가 죽으심으로써 확증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나 위한 죽으심은 단순히 내 죄를 씻어 내가 용서되고 영생 얻고 하는 그런 피상적인 것으로만 인식할 일이 아니라 이상 설명과 같이 자신을 내게 송두리째로 영원하신 선물로서 주시어 오로지 나만 위하시게 되어 있다는 이 엄청난 사실의 영원한 선포로서 정확하게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이는 사랑의 속성을 따라 상대적이고 자유 선택에 따르는 것으로서, 일방적이고 기계적인 것이 아님은 재언을 요지 않는다. 그래서 믿는 자만 얻는 구원이요 믿지 않으면 절대로 해당 사항이 될 수 없다. 하나님께서 선별하고 차별하심이 아니라 순수하게 나의 자주 독립성에 의한 자유 선택의 결과물이다.

이런 필수 사항이기 때문에 말로만 사랑함이 아니라 행위가 따라야 하므로(세상 모든 사랑이 그러하고, 하나님의 말씀은 이렇게 누구든 이해할 수 있는 인간의 언어로 그 구원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가르치시는 것) 야고보는 믿음에 따르는 행위를 가리켜 "죽은 믿음", "헛 믿음"이 아닌 산 믿음이라 한 것이다. 다시 말해 자기 부인이요 매일 십자가 짐이다. 바울이 강조한 "자기를 위하여 살지 않음"(고후 5:14,15),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않음"(롬 15:2,3) 다시 말해 사람 사랑이다. 한 아버지를 모신 믿음의 형제들에 대한 사랑이 첫째이고, 그 다음으로 장차 형제들이 될 수도 있는(물론 모두는 아니지만) 세상 사람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이다.

그 사랑으로써 그들을 구원하여 건지는 일이 우리에게 부과되어 있으므로 우리가 구원 받음을 "보내심 받음"(요 20:21,22)이라 하는 것이다. 사람 살리는 것이 목적이므로, 사람 살림에는 그 상대가 되는 이들 곧 하나님 앞에서의 죄인들의 저주를 함께 짊어져야 하는 것이기에(그리스도께서 친히 본을 보이신 대로) 고난 받음이 필수인즉, 우리가 "현재"(요일 3:2ㅡ"지금은"이 아니라 "지금"이라고 해야 읽기 쉽건만 이런 작은 것조차 방치해두고 있다) 하나님의 아들들로서 당연히 천사들처럼 초자연계 몸을 입고 있어야 하지만, 이런 누추하고 연약한 육체를 그대로 입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우리의 모습은 그리스도의 현재 계시는 모습 그대로다. 주님의 모습이 바로 내 모습이신 때문이니 이것이 3위1체의 원리다. 그런즉 사람 살리는 선한 일을 하기 위해, 그리고 이 '사람 구원'을 한사코 막으려 덤비는 악령들과의 전쟁에 대비하여, 일부러 이런 낡은 자연계에 속한 몸을 다시 걸치고서 세상에 임한 모양새이므로 우리가 "보내심 받았다"고 하는 것이다. 어디로부터 받았느냐, 물론 하늘로부터다.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는 그리스도로부터 나온 것이다. 그 모양새를 이 땅에서도 이루시느라 그리스도의 성령(아버지의 성령과 하나되신)께서 내 안에 게심이니, 이는 바로 나 자신이 하늘 하나님의 우편 보좌에 그리스도와 함께 현재 앉아 있는 실상을 반영하는 것이다(엡 2:6).

"천국, 하늘 나라", "하나님의 나라", "아버지의 나라", "그리스도의 나라" 등 명칭이 많으나, 결국 우리의 고향(본향)이니, 때문에 이 세상을 "나그네 길"이라고 성경이 명명함이요 왜냐면 인간(아담)이 원래 초자연계 육체로서 초자연계인 에덴낙원에서 살았기 때문이다. 3위1체의 원리가 가리키는 사실이 여기에도 있으니 이 또한 중요하다. 이런 사실에 입각해서 보면 세상 삶에서의 내 목숨을 미워하지 않을 수 없고 사랑할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오매불망 나의 고향에 대한 향수(鄕愁)뿐이다. 인식의 일대 혁명이 일어나게 되어 있다.

그런데도 "기독교"는 이 사실을 전적으로 외면해 온 것이다. 구하고 찾고 두드리지 않고 안일하게 남이 써놓은 글이나 말에만 무조건 의뢰심을 발동하여 추종한 결과다. 계속 강조하는 바로서, 성경에 대한 이런 부분적인 몰이해는 "돌이켜 어린 아이 같이 된" 이들에게는 구원받음에 아무 장애를 주지 않았으나, 무거운 암흑의 장막을 드리운 것만은 사실로서 대개 지식인으로 자처하는 이들에게 걸림 돌로 작용해 온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세상 애착에 대한 죄 의식을 마비시키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지금까지 교회는 인간이 초자연계 능력의 존재였음을 가르치지 않았다. 모르니까 그런 것이다.

아담의 "죽음"도 영적인 죽음, 하나님과의 교제의 단절 등으로 애매 모호하게 표현했을 뿐이다. 초자연계 몸으로부터 자연계 몸으로의 퇴락임을 설명하지 못했다. 사탄이 "용, 옛 뱀"(계 12:9/20:2)임을 성경에서 두 번씩이나 연달아 강조해도 여전히 그룹(cherub) 중 하나라고만 고집한 데에서도 그 무지무식은 여지 없이 드러난다. (그러므로 지금까지의 "전통적인" 교리에 대한 미련의 거품을 과감히 걷어낼 일이다. 그 "전통 보수"의 권위는 오늘날 사라진 지 오래다.)  초대교회는 모든 말씀을 성령의 계시를 받아 분명히 가르쳤으나 2, 3백년 내려오면서 바울이 탄식한 대로 급속도로 하나님의 말씀에서 이탈해 간 것이다(갈 1:6).

이것은 우리가 보기에도 기이한 것이다. 노아 홍수라는 엄청난 대재난의 혹독한 맛을 보고서도 그 비극적 사실을 노아로부터 배워 잘 알면서도 급속도로 세상이 타락해 간 것과 같은 부정할 수 없는 현상이다. 그만큼 악령 사탄이 인생들의 사고방식을 무소불위로 장악하고 휘두르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다. 말씀이 어려워서가 아니다. 너무 간결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씀을 왜곡시켜 온 것 자체가 하나의 경이요 기적이다. 초능력은 모두 기적으로 통한다. 악령 사탄의 초능력에 의하여 지금까지 인생들이 좌우지 되어 온 까닭이다.

 "돌이켜 어린 아이 같이 된" 자들만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고로 하나님께서도 이런 무지무식에 대해 억지로 개입하실 이유가 없다.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이 가려져 있을 때는 스스로 오만해져서 망하게 되어 있는 자에게만 가려져 있기 때문이다(고후 4:4). 그러나 지금은 모든 것을 총 정리하게 되어 있는 마당에서 "구원"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의 올바른 구원의 말씀이 전파되었다는 그 "증거" 차원에서도 가감 없는 순수한 말씀이 모든 인생에게 알려져야 할 때가 온 것이다. 그래서 3위1체 원리와 3운법칙의 등장이다.

고로 자기 부인, 매일 십자가 짐 다시 말해 내가 그리스도로부터 보내심 받아 성령과 더불어 함께 일함은(고후 6:1/벧전 1:12), 인류에 대한 최고도의 봉사, 보람찬 사랑의 최고 수준의 역사(役事), 사람 살리는 최고의 인술(仁術)을 베풂을 말하는 것이다. 이를 누가 마다하리요. 이를 꺼리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 자체를 잘못 깨달아 잘못 채운 단추에서부터 비롯된다. 처음부터 "복음"을 잘못 배운 것이다. 신학교를 나와도 목회자가 되어 교회를 맡아도 마찬가지다. 바로 배운 사람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혹은 절대 다수가 그렇다는 얘기다. 이것이 오늘날 기독교의 현주소다. 이것이 3위1체의 원리 및 3운법칙이 세상에 나온 이유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 그대로 가감없이 정확히 그 뜻 풀이를 하여 초대교회 당시처럼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도록 하려 함이다.

히틀러 아래에서의 독일 청소년들의 광란이나 중국 모택동 아래에서의 홍위병들의 광란과 같은 그런 광란의 시대가 왔으니 곧 오늘날이다. 적 그리스도의 사주 아래 그런 광란이 최고 절정을 이룰 것인데 이상 모든 현상은 그 예행 연습과 같은 성격이다. 인터넷, TV 등등으로 해서 그 광란의 도수는 날이 갈수록 더해 가고 있다. 완전히 미쳐 가고 있는 세상이다. 소위 기독교 국가라고 자처하는 스웨덴에서는, 동성 성행위가 죄악이요 멸망의 장본이 됨을 소돔 고모라의 경고대로 경고했다 해서, 미국에서는 소위 "동성 결혼"이라는 천하의 불법을 수용하지 않고 그런 맹랑한 불법행위에 대해 주례 서 주기를 거부했다고 해서 180일 징역형에다 매일 천 달러씩 벌금형을 추가시켰다 하고, 역시 기독교국가라고 자처하는 영국에서는 노방(路傍) 전도자가 길거리에서 전도할 때 예수님과 마호메트를 비교해 차별해서 말했다는 죄명으로 체포했다고 하지 않는가.

기독 자유당의 팜플렛이 그렇게 전하고 있다. 완전히 열병에 들떠 있는 세상이다. 기독교 문물을 받아들여 개화되어 있음을 자랑하노라는 국가들이 이 모양이다. 양식과 양심까지 마비되어 있다. 오히려 그들이 천대하는 국가들이 양식과 양심만은 살아 있어 여기 동조하지 않고 있으나, 이 역시 변동은 시간 문제다. 로마 제국 핍박 시대에 기독교도가 로마시에 불을 질렀다고 네로가 엉뚱한 트집을 잡아 교회를 무참히 탄압한 것처럼 이제는 과거엔 이런 일이 있으리라곤 꿈에도 생각 못했던 "동성 성행위자 차별"이라는 기상천외의 죄목으로도 교회를 탄압하는 구실이 되어 있으니, 악한 자 사탄 곧 용이 이 세상을 지배하는 실정이 원래 이러하다. 언제든 무슨 수로든 북한 사회 이상의 강제력이 동원될 수 있는 터이다.

이런 심각한 사태를 해결하자고 해서 기독교도가 정치에 참여하겠다고 한다. 이 역시 꼴불견이다. 정치적으로 해결하는 것이었다면 초대교회는 벌써 그렇게 했을 것이다. 하루에 3천, 5천씩(남자만) 회심하여 교회로 돌아오는 여세를 몰아 정치 세력화하여 정권을 장악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교회의 참 모습은 앞서 설명한 대로 '고난 받는 약자'가 됨에 있다. 이것이 성경의 진실성의 자체 증명이다. 앞에서 지적한 노아의 방주, 이스라엘의 독립(물론 그런 것도 당연히 제 몫을 하고는 있지만) 등 일련의 사실이 성경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다. 성경의 하나님 말씀으로서의 증거는 항구적으로 그 자체 증명인 것이다. 그 자체 증명 중의 하나가 바로 이 그리스도의 "약하심"(고후 13:4),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머리를 본으로 삼는 교회의 약함(고후 12:10)이다.

세상 종교의 특성을 보라. "믿겠느냐 말겠느냐, 안믿으려면 우리의 정의의 칼을 받아라" 하는 일부 종교의 구호처럼, 절대자를 선전하는 것인 만큼 절대적인 강자의 군림을 강조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거꾸로 모든 이들에게 죄인 취급 당하는(구원 상대자가 하나님 앞 죄인으로서, 이러한 우리 위해 우리 죄의 저주를 받으심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이셨음과 같이, 우리 역시 같은 본을 따라 같은 방법을 취함이 필연이므로) 고난 받음이 바로 성경의 진실성을 그 무엇보다 웅변으로 입증함이다. 그러므로 사탄은 이 강력한 의미를 회석시키기 위해 기독교를 위장하는 세상 종교를 내세워 세상 나라들을 한 때 지배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 정당을 만든다는 것도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웃기는 일이다. 교회로서의 본분을 저버림이 극도에 달했기에 일어나는 현상 중 하나다. 기독교 국가가 되는 것이 정답이 아니다. 이미 그런 체제를 갖추고도 오늘날 성경에서 그렇게도 엄중하게 경고하고 있는 소돔고모라의 죄(유 1:7/벧후 2:6/롬 1:26,27ㅡ동성 성행위)를 지적하여 말한다고 처벌하는 것을 보라. 그리스도 교회의 전략은 그렇게 인간적인 방법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부패한 유럽 국가가 그렇게 한다고 나도 따라 한다는 것인가. 옳은 것을 본받아야 하는 것이다. 속 빈 강정이기 때문에 그런 들뜬 모방을 일삼게 된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영, 성령)으로 되는 것이다" 하심과 같다. 그렇게 해야 "큰 산이라도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된다"[슥 4:6-7]. "두 사람이 합심하여 구하면 아버지께서 들어 주실 것이다"(마 18:19) 하고 주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교회가 합심해서 드리는 기도에 천하사를 제어하는 막강한 위력이 있다. 이렇게 하지 않고 이 최대의 막강한 위력을 발휘하는 수단을 택하지 않고 인위적인 수단 방법에다 호소하는 것 자체가 이미 교회가 제 빛을 잃고 기도를 얼마나 등한시하는지를 여실히 입증하는 것이다.

과거 발행되던 월간지 한 페이지가 달랑 남아 있기에 우연히 보니 어느 나라인지는 모르나 공산주의자들이 국정을 찬탈하려는 시도가 자행됨을 알고 피비린내 나는 공산 혁명이 일어날 것을 염려한 교회 중 뜻 있는 이들이 교파를 초월하여 거의 6개월간이나 합심 기도 끝에 마침내 목적을 달성했다는 일화가 소개되어 있다. 그 나라 대통령이 정부 내에 잠입해 있는 적색 분자들을 모조리 찾아내어 추방해 버린 것이다. 또 영국에서는 국가적 위기를 당하여(이 역시 공산주의들과 관련된 것이라 기억하지만) 이를 염려한 한 부부가 합심해서 간절히 기도한 결과 마침내 그 국면 전환을 이룰 수 있었다는 간증(그 저술가의 서책 중 일부 내용)을 과거 접했던 일이 있다. 이런 사례는 수집하자면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인 때문이다. 인위적으로 나가면 인간적인 결과밖에 얻지 못한다.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으로 나가면 당연히 하나님 친히 개입하시게 되는 것 또한 불문가지다.

이미 설명한 바 있지만 여기서 다시 부언하면, 왜 동성 성행위가 비정상으로 마땅히 타기되어야 하고 병적이고 치료의 대상이며 사회적으로 용납될 일이 아니냐 하면, 3위1체의 원리에서 설명할 때 양자간의 하나됨은 성질이 정반대되는 것끼리의 조화 통일 즉 남녀 사이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남녀가 서로 좋아해서 사귀더라도 어느 한 쪽이든 배우자가 있을 때 부당하며 불법이 되는 것은 이러한 둘이 하나됨의 원리에서 벗어나기 때문이다. 미혼 남녀가 접촉하는 것도 둘이 하나로서 결합하는 약속을 하면 그 사실을 세상에 공표함으로써 떳떳이 하나를 이룬 다음에 할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불법이요 범법일 수밖에 없다.

상대에게 해를 입히는지(서로가 상대를 대함에서 부담이 없으므로) 여부를 가리는 차원에서 논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의식을 강조하는 삶의 법칙으로서의 3위1체 원리 곧 만유의 법칙에 위배되는지 여부를 철저히 따지는 까닭이다. 자연법칙을 따라 자연계가 유지 존속되듯이 이 만유 질서의 기본이 되는 법칙(3위1체의 법)은 어떤 경우에도 준수되어야 마땅한 것이다. 개인적으로 서로가 좋아서 행하는 일일지라도 거시적 안목에서는 전체 사회 기강을 해치는 일이요 전체의 행복 도모에서 장애 요인이 되는 씨앗이 되는 것인즉 마땅히 척결 대상일 수밖에 없다. 

인류사는 대규모의 기만사 (2)


필자는 이 3운법칙이나 3위1체 원리를 구명(究明)해내기 위해 학문적으로 접근한 적이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보이는 자연계에만 국한해서 모든 인식 작용을 발동시킬 수밖에 없었던 인간인지라 "보이지 않는" 반(초)자연계 영역은 금시초문일뿐더러 한계 저너머이기 때문이다. 만일 학문적으로 접근했더라면 3위1체 원리는 발견되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까지의 모든 인간 인식은 자연계에만 한정되어 있었던 터라 자연계의 영역을 벗어나는 것은 아예 감도 잡을 엄두조차 내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고로 필자는 성경을 통해 초자연계의 실존을 믿고 있었다는 그 차이만 있는 것이다. 그런 차이야 실상 대단한 것도 아니다. 따라서 지구상의 모든 사람이 모두 자기 스스로 발견해낸 것과 같은 의미만이 있을 뿐이다. "3위1체의 원리"란 것이 있으니 두드려보고 만져보고 쓰다듬어보고 해서 괜찮은 물건이라 싶으니 가져다 쓰면 되는 것뿐이다. 따라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 "보어의 상보성 원리", 다 격에 맞고 그렇게 말해야 마땅하다. 왜냐면 그 연구자들의 각고면려 끝에 이루어낸 업적인즉 상찬 받아 마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개의 3위1체 원리, 아무개의 인간 생애의 법칙, 이런 것은 한 마디로 천부당 만부당이다. 다만 성경만은 누구 못지 않게 읽었다는 말은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성경을 읽는 일이란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성경 많이 읽은 것을 내세울 것은 하나도 없다. 왜냐면 성경은 모든 사람이 마땅히 읽어야 하는 것이기에 그러하다. 

그러면 어떤 경로로 해서 3위1체의 원리 등이 세상에 알려졌느냐 할 때 "아무개가 발표함으로써 알려졌다", 그것뿐이다. 다음 사실은 덧붙여도 좋을 것이다. 즉, "그는 성경을 통하여 진리를 탐구하고 있던 차였다". 더 완벽하게 기술하려면, "성경 말씀대로 '구하고 찾고 두드린' 결과 마침내 들어가게 되었다고 말한다"가 될 것이다.


두드리고 찾고 구하는 일이야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의지(意志)가 필요하다는 것뿐이다. 이제는 그 실체가 일단 밝혀졌으니 지금부터 학문적 접근이 가능할 수도 있겠고 이 방면에 기본 소양을 갖춘 이라면 누구나 가능한 일이겠지만ㅡ. 그러나 초자연계의 벽에 부딪치는 한계가 명백한데 학문적 접근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러면 무엇이냐, 목적이 무엇이냐. 필자의 목적은 인간 생애의 법칙이라는 말 그 대로 그리고 3위1체의 원리가 가르치는 그대로, 우리 인간과 이 인간을 창조하신 분과의 관계, 모든 피조물의 어버이가 되시는 조물주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원래 성경에 밝힌 그대로 알림에 있다.

그리고 이를 통하여 애초의 그 영광스러운 인간의 모습으로 회복하는 길을 성경에서 가르치는 대로 홍보하고 인하여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고통 고난의 양자 택일에서 그 올바른 방향을 제시함으로서 제대로 선택하여 그르침이 없도록 하는 이 사명 의식 외에는 일절 다른 의도가 없다. 곧 삶의 법칙, 인간 구원의 법칙이니 당연히 3위1체의 원리에 터전한 것으로서 간단히 말해 '머리와 몸으로 구성되는 한 몸' 체제에서의 삶이요 구원의 원리다. 임진왜란 당시 이공(李公) 순신(舜臣)은 그런 정신을 훌륭히 입증해낸 역사의 귀감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순신정신 선양운동을 벌이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우리 위해 마지막 아담이 되어 주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자기 부인"은 바로 그 완벽성의 결정체다. 세상에서의 공동체 의식(이공으로 인해 충분히 구현된)은 오직 그 그림자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그 실체를 만끽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공동체 의식은, 세상이 안일하고 편할 때에는 빛을 발하지 못하고 항상 응달 신세가 되는 것처럼(악마 용이 이 세상을 현재 지배하고 있는 이상 어쩔 수 없는 실상), 이 완벽성을 기하는 자기 부인의 삶 곧 그리스도 안에서의 올바른 의(義)와 선(善)의 자세가 세상에서 환영 받을 리 없다. 왜냐면 그것은 악마 사탄이 목숨을 걸고라도 저지하고 있는 현안이기 때문이다. 영생으로 직결되기 때문이다. 영생에 이르는 자가 많으면 많을수록 자기 신변에 이로울 수가 없다고 판단해 온 사탄이다. 이런 점에서도 그러하고, 의롭게 선하게 살려고 하여 모두가 함께 최대 행복으로 들어가는 영생 길을 택함에는 반드시 시련과 역경과 시험이 따르게 되어 있다.

반면 멸망에 이르는 통로는 반드시 이 세상에서 수월하고 누구나 쉽게 추구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속성상 그렇다. 이유는 올바르게 삶으로써 그 마땅히 받아야 할 대우를 향락할 수 있는 경우라면 누구나 이에 호응하고 달려듦으로써 악인과 의인을 식별할 수 없게 되는 까닭이다. 왜 이 둘을 반드시 식별하여 가려내어야 하느냐, 지금은 인생 삶 자체가 고(苦)이기 때문에 이 고를 벗어나기 위해 행하는 의와 선이므로 누구나 고를 기피하고 낙을 찾게 마련이다. 그러나 이 고를 벗어나 에덴낙원에서처럼 낙을 누리는 단계로 일단 접어들게 되면 당장 그 본색을 드러내어 아담 부부를 죽음에 빠뜨린 용(dragon, 龍)의 짓거리를 되풀이하게 되어 있음이다.

고로 이 세상은 생리적으로 악이 형통하고 의와 선이 역경을 당할 수밖에 없는 여기에 초점에 맞추어져 있으니 각별히 이 점에 유의할 일이다. 즉 영생의 길과 문은 좁고 멸망에 이르는 문은 크고 길도 평탄하여 찾는 이가 인산인해를 이루게 되어 있다. 이는 방금 설명한 대로 필연이니 이 걸림 돌에 넘어가지 말 것이다. 의롭고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반드시 이 세상에서 갖은 시련과 고난의 대상이 되어 있다는 사실을 명심할 일이다(딤후 3:12). 이런 것을 이상한 것으로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오히려 당연지사로 받아들일 일이다.

이 공동체 의식이 3위1체의 원리를 따른 삶의 법칙임을 설명하였거니와 한 몸 체제를 말함이니 따라서 한 몸을 이룬 단 하나의 지체라도 고통을 당하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나누게 되어 있는 것. 북한에서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고난 고통을 하나님 또는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단 한 가지 이유만으로 당하고 있는 사실을 안다면, "자기도 함께 갇힌 것 같이 갇힌 자를 생각하고 자기도 몸을 가졌은즉 학대 받는 자를 생각하라"(히 13:3)는 것이 머리의 명령 곧 머리의 뜻임을 알아야 하는 것. 그럼에도 소위 "하나님의 축복 받아 잘 산다"는 사탄의 교리를 내세워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는 대형교회들이 있으니 그런 미혹에 물들지 않도록 조심할 일이다.

갇힌 자를 생각하면서 이 세상 삶을 향락할 수 있는가. 감히 "하나님의 축복 운운" 할 수 있는가. 그러면 그 극심한 탄압 속에 있는 북한 교회는 축복을 못받아 그런가. 그래서도 마귀의 소리요 그 속임수라는 것이 드러나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은혜와 축복 곧 하나님의 아들로서 누리게 되어 있는 영생과 구원 외에 달리 그 무엇이든 "축복 운운" 할 때는 무조건 그리스도 복음의 진리를 알지 못한다는 증거가 되니 각성할 일이다.

삶의 법칙이 인간 구원의 법칙이 됨도 하나님의 아들 친히 우리의 고난과 죽음에 동참하심으로써 한 몸 체제를 구현하시고 이 바탕 위에서 우리로 하여금 당신 자신의 생명에 동참하게 하시는 원리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몸된 우리가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업에 투입되어 "보내심 받은"(요 20:21,22) 이치가 바로 이것이다. 즉 그리스도의 그러한 "남으신 고난"에 동참함으로써만 이룩되는 인간 구원의 사업이다. 때문에 구원 받았으면 마땅히 초자연계 몸의 초능력으로 삶을 향유해야 함에도 일부러 이런 자연계 몸으로 세상에 보내심을 받은 의미가 우리의 성령 받은 곧 구원의 의미임을 재차 강조한다.

이와 같이 시련과 역경과 시험 가운데서 고난의 죽음의 대상이 되어 있는 까닭에 이 세상에서 번듯하게 호화 웅장을 극한 대형건물을 지어놓고 한가하게 노닥거리고 있을 여유가 없음은 당연귀결이다. 초대 교회는 향후 모든 세대 모든 교회의 본으로서의 의미가 있다. 과연 초대교회는 어떠했는가. 개장하자마자 핍박부터 들이닥쳤다. 불의한 헤롯왕의 칼날에 이유 없이 야고보 사도가 쓰러졌다. 없어서는 안될 교회의 기둥 같은 존재다. 성령 충만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육성으로 전달하던 스데반에게 감히 손을 대어 돌무더기의 피투성이로 만들어 죽여 버렸다.

감히 하나님의 사람을. 이런 것이 모두 성경의 진실성 즉 하나님의 말씀임을 유감없이 입증하는 증거다. 만약 지어낸 이야기라면 이렇게 둘러댈 수 있을까. 어림도 없다. 오히려 그렇게 작당 치는 하나님의 원수들을 제압하고 이기는 것으로 그렸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누가 그런 일견 "약한" 또는 "무관심"의 하나님을 사랑하여 순종하리라 기대할 수 있겠는가. 마땅히 강한 하나님으로 그려야 할 터인데 정반대로 약하디 약한 존재로 부각시키지 않았는가. 이런 것이 성경의 진실성의 자체 증명이다. 다른 그 어떤 것에도 그 진실성 증명을 의뢰하지 않고 기대하지 않고 의존하지 않는다. 스스로 증명하는 이 막강한 권위를 보라. 

때문에 이러한 환경과 분위기 속에서의 그리스도의 교회이니 당연히 어떤 모습이어야 하겠는가. 물을 것도 없이 이런 극악한 핍박에 대처하는 모양새일 수밖에 없다. 대형교회? 웅장한 건물? 천만에다. 핍박 받아 당장 헐리거나 탈취 당하여 다른 용도로 전용될 건물을 무엇 때문에 힘들여 짓겠는가. 이런 웅장한 예배당을 짓는 것마다 "우리는 이 세상 신이 사탄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다"고 세상에 공표하는 꼴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내 마음대로 골라잡아 믿는 것이 아니다. 이것 안믿으면 저것도 믿지 않음이다.

하나님의 말씀도 믿지 않고 그래서 구원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무엇 때문에 교회당부터 크게 지어 올리느냐 이 뜻이다. 모두 속 빈 강정이란 증거다. 고로 처음부터 말씀하시기를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다"(마 18:20) 하신 것이다. 이는 당연히 "항상 핍박의 대상"이 되어 있는 교회이므로 숫자가 많고 적음에 개의치 말라는 미리부터 주시는 경고이시다. 숫자가 많아야 교회이고 적으면 아니라는 공식은 없다. 오히려 두 셋만 모여도 주님 계시니 아버지 계시고(요이 1:9) 하나님이 계시면 거기가 성전이요 교회이다.

이 말씀은 "참으로 다시 너희에게 말하지만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실 것이다"(마 18:19) 말씀하신 끝에 하신 것이다. 즉 교회로서 모이는 목적 그 주된 이유가 합심 기도다. 그냥 찬송 몇 절 부르고 설교 듣고 하는 것으로써 예배가 되지 않는다. 합심 기도와 더불어, 매일 피차 권면해야 할 필요성에서다.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않는 악심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일이므로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기" 위함이니, "시작할 때에 확신했던 것을 끝까지 견고하게 잡아야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되어"(히 3:12-14) 천국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영생하는 길이 험하구나 할 필요가 없다. 현실이 죽음인데 이 죽음에서 구출되었다는 이 단 한 가지만으로도 기뻐 춤출 듯이 되어야 그것이 정상이다. 그래서 베드로도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니 예수님을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 것이며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벧전 1:7-9) 하였다. 세상을 잘못 인식하고 있었기에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것인가" 탄식부터 먼저 하는 것이다(눅 18:26).

이런 저런 실상을 아무 것도 모르고 단지 사람 사는 세상, 살면 살아지는 것으로 착각해 왔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오셔서 친히 말씀하시고 실상을 밝히심으로써만 비로소 알아지게 되는 인류의 비극적 실태다. 인간을 죽음의 구렁텅이 속으로 빠뜨린 철천지원수 악마의 장중에 놓여 있는 세상인 것이다. 이 사실을 무시하기 때문에 성전이랍시고 앞다투어 웅장한 건물을 짓는다. 그것이 하나님께 무슨 영광이나 되는 듯이. 정녕 그러하다면 초대교회는 웅장한 건물부터 시이저의 궁전보다 더 화려하게 지어 올렸어야 했으리라.

그러므로 중국의 지하 교회(지금은 조금 나아졌다고 하나), 현재의 북한 지하 교회를 기준으로 하여 교회 운영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왜냐면 그것이 초대 교회의 패턴이기 때문이다. 이들 교회가 바로 초대 교회의 본보기를 그대로 이어 가고 있는 것이다. 비교적 자유를 누려 왔다고 할 서구 교회가 타락 일로에 접어들어 썩은 냄새가 천지를 진동할 정도라 동성 성행위에 대해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있는 실태를 보아도 당장 알 수 있는 일이 아닌가. 고로 ㅡ

만인 제사장(막 11:17)
만인 제물(하나님의 어린양과 한 몸을 이룬)
만인 성전(聖殿, holy temple)

이상 세 가지를 그 어느 때보다 강조할 시점에 이르렀다. 만민의 기도하는 집은 잘못된 번역이고 "만민을 위한 기도의 집"이 옳다. 그리고 기도는 제물이 선행되어야 응답이 된다. 우리가 받은 고난이 바로 이 제물로서의 역할이다(롬 12:1). 그리고 이 제물은 하나님이 받으셔야 하는 것이므로 성전에서만 거행됨이니 하나님 계시는 내 육체가 곧 그 전이다. 그래서 우리 자신, 우리의 육체가 이 3요소를 구비하고 있는 것이다. "만인"이라 함은 "믿는 자이면 누구나 그렇다"는 뜻이다. 그 중에 본이 되는(벧전 5:3) 자에게 목자(pastor)의 임무가 부과된다. 사도 시대 교회는 이들을 "감독", "장로"라고 불렀다. 어떻게 부르건 의미는 같으니 상관 없다.

그러므로 교회 운영은 어려울 것이 없다. 구원 얻는 믿음의 본질은 변화된 삶에 있으니 곧 내 속에 나의 영혼 격이시요 머리가 되시는 마지막 아담을 모심으로 되는 일이다. 단지 머리되시는 주님(주인, 소유주)의 지시를 따라 한 아버지의 한 형제들을 이룬 식구들이 함께 모여, 전술한 바와 같은 합심 기도 및 피차 권면에 힘쓰는 것이다. 이런 일을 함에는, "두 사람이라도 합심 기도하면 다 응답이 된다"고 약속까지 하셨으니 몇이 모이든 숫자에 괘념하거나 연연해할 이유가 없다. 그래서 두 셋이 모여도 "내가 함께 있으마" 하신 것이요 그리함으로써 교회는 이미 성립되어 있는 것이다. 주변에 전도하여 사람들을 이끌어 오면 수가 불어나는 것은 정한 이치다.

교회의 주인은 그리스도시다. 그러므로 교회 내 중요 현안에 대해 어떤 결정이 있을 때 초대 교회는 "성령과 우리는"(행 15:28) 이러이러하게 결정하였노라는 식으로 나온 것이다. 마땅히 우리도 이 본을 따라야 하는 것이다. 교회의 머리로서의 그리스도이시나 항상 아버지와 함께 하나로 계시고 움직이시므로 "성령"이시라 하는 것뿐이다. 따라서 교회의 주인이 되시는 이께서 "두 세 사람만 모여도 내가 거기 있다" 하신 마당에 누가 무엇이라 감히 입을 놀릴 것인가. 다시 말해 두 세 사람만 모여도 교회 기능은 충분히 되는 것이다. 인간이 제정한 특수 직제에 의한 직분자가 주인일 수 없고, 오직 그리스도시다. 또한 소위 "성전"으로서의 건물이 교회 기본 요건일 수 없음은 앞에서도 설명했다. 그리스도 오시기까지의 모세 시대에 하나님 성전으로서의 예루살렘 성전에 대해서 조차도 성령 충만하여 성령의 말씀으로 스데반은 다음과 같이 설파하지 않았던가.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받아 야곱의 집을 위하여 하나님의 처소를 준비케 하여 달라 하더니 솔로몬이 그를 위하여 집을 지었으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니 선지자의 말한 바 '주께서 이르시기를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냐,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하셨다"(행 7:46-50) 한 것이다. 고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성령을 모시고 있는(요이 1:9) 그 사람이 성전이요 그런 사람이 모인 자리가 당연히 눈에 보이지 않는 성전이 되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계시므로 하나님 계시는 곳이 성전인 것이다.

우리의 이 세상 나그네 생활(안주 정착하여 정상적인 삶의 낙을 누림이 아니라 내 본향에서의 본격적 삶을 동경하며 임시 방편으로 쓰는 한시적 수단)의 모습을 묘사하시어,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거니와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 것이니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할 것이다" 하셨다.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을 것이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실 것이다"(요 12:24-26) 하셨는데 주님을 "따르는" 것이 무엇이냐, 바로 위에서 밝히신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는" 생활인 것이다.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삶이다. 같은 삶이라도 쓴 것이 있고 단 것이 있다. 지금은 쓴 것부터 먼저 맛보는 상황이요 단 것은 영원무궁하므로 차후에 올 차례다. 그 영원무궁한 것에 비해 미리 쓴 것부터 맛보아야 하고 맛볼 필요성이 있다는 것은 지극히 합리적이다. 그러므로 각 교회 교역자부터 성경을 다시 읽고 깨닫는 것이 우선이고 시급하다. 그렇게 해야 제대로 된 순서다. 그렇지 못할 경우 교인들이 그 교역자 위해 기도하는 것이 마땅함을 다시 강조한다. 이 모든 사실을 깨달았다고 다니는 교회를 박차고 뛰쳐나올 것은 없다. 같은 교인들과 소통하고 교역자를 위해 드리는 기도의 남 몰래 흘리는 눈물이 성경적이다.

정 소통이 안될 때에는 잠자코 거기서 물러남이 옳다. 어떤 일로든 다투어서는 안되니, 거기에 내 자산이 얼마나 바쳐졌든 간에 손 털고 나오는 것이 온당하다. 하나님께 바친 것이니 그 바친 재산 목록은 하늘에 비치되어 있을 것이므로 헛일이 아니므로 아까워할 필요는 없다. 바치는 마음이 문제이지 액수도 관계 없고 사후 처리도 괘념할 일이 아니다. 최선껏 다해서 안되면 손을 놓는 것이다. 굳이 그것을 지킨다고 해서 덕될 일은 없다. 정 그것이 마음에 걸린다면 그 집단에 남아 헌신적으로 기도에 전념할 일이다. 모든 기도는 들으시게 마련이다.

집단에서 나오게 될 경우 위에서 지적한 대로 두 셋이 모이는 북한식 교회 운영 방법을 취해도 아무 하자는 없다. 그것이 교회가 아니라고 말할 사람은 성경을 모르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없다. 성경을 모르는 사람이 절대 다수라 한들 그것이 무슨 대수인가. 진리대로 행하면 그뿐이다. 하나님 계시고 천사들이 절대 세력으로 호위하는 마당에 누가 무엇이라 하리요. 악령인들 손댈 것인가. 건물이 성전이 아니라는 점만 확인해두면 된다. 하나님께서 친림(親臨)해 계시는 각자의 몸이 성전이다. 성전은 거룩하니 당연히 거룩하지 않고는 성령께서 계실 수가 없다.

거룩함이 무엇인가. 내가 이룩한 거룩함이 아니라 거룩함의 토대 위에서 즉 그리스도 친히 성령으로 나를 위하시는 근거 위에서 내가 나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는 것이(고후 5:15) 거룩함이다. 때문에 "거룩함을 온전히 이룰"(고후 7:1) 수가 있는 터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1) 이룸이다. "항상 복종함으로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자신의 구원을 이루라"(빌 2:12)는 경고와 일치된다.

교역자는 이상과 같은 취지에 따라 구역 예배(장로교에서 시행하는 것과 같은)를 활성화시켜 세포 조직과 같은 체제로 교인들로 영적 무장을 하게 함이 필수이다. 그러면 급속도로 교회 확장을 유도할 수 있다. 왜냐면 끊임 없이 전도하게 하여 사람들을 끌어들임으로써 제자 훈련을 실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교회 부흥운동은 거기서 태동되어야 바람직하다. 그런즉 대형교회당을 선호하지 말되 그렇다고 현재 사용하고 있는 건물을 용도 폐기할 필요는 없고 오히려 최대한으로 적극 활용할 일이다. 소위 "성전"이라 하여 특정일에만 개방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365일 개방하여 전도관으로 또는 기도실로 얼마든 활용할 수 있다.


그렇지 못한 경우 초대교회 또는 핍박받던 중국 교회에서 시행하던 집 교회(골 4:15) 형식으로 해도 얼마든지 성경적이다. 집에서 모이기는 8명 내지 10명 정도라도 좋다. 실속이 있으면 되는 것이지 형식에 매이지 않는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다 하신 대로 건물 역시 마찬가지다. 소수가 모일 때에는 동성끼리가 좋다. 이런 문제에 신경을 쓸 필요가 있다. 당시 고린도 교회를 위시하여 초창기 교회에서는 세인들이 비평하여 말하기를 남녀가 밀실에서 엉뚱한 짓을 도모한다는 말이 나돌았음과 같은 오해를 불식시키는 차원이다. 반드시 남녀가 모여야 교회가 구성되는 법은 없다. 여기에 관한 것은 "바영사운"(http://hahahehehihihohohuhu.com) "집교회", "메시아 교회" 등에서 상술하였으므로 참고하시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