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3월 29일 화요일

전천후(全天候) 희열과 평안ㅡ고난 중에 아이들처럼 기뻐 껑충껑충 뛰라고 하셨다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려 하지 않았다"(others were tortured, not accepting their deliverance, that they might obtain a better resurrection)-히 11:35. 그러면 더 나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힘써 악형을 자진해서 받을 것인가? 그 뜻이 아니라 자기에게 닥치는 악형을 굳이 면하려 하지 않았다고 한 것이다. 왜냐 그 이유를 밝혀 "더 나은 부활"이라 한 것이다. "더 나은 부활"이 목적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여 하나님의 일을 하다보니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어지는 것이다.
만일 그런 것이 목적이라면 자아중심이므로 그렇게 해서 아무리 "악형"을 받아도 무의미하므로 일부러 그런 사람은 그런 것을 받지 못하도록 차단하실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 받는 것이 "은혜"(빌 1:29)라고 했듯이 그런 은혜를 아무에게나 허락하실 리가 없다. 다만 그런 악형을 당할 때 굳이 면하려 하지 않는다는 데에 방점을 두게 된다.

"고로 낙심하지 아니하니 겉 사람은 폐멸이나(to decay, perish)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가벼운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무거운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의 관심사는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으로서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다.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는 것이니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는 바...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 진 것 같이 신음(해산의 수고 때의)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다.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다"(고후 4:16-5:5).

간단히 말해 우리가 성령을 받음으로 초자연계 몸으로 나중에 변화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썩어질 육신으로 되어지는 다시 말해 보이는 이 세상의 모든 일들은 우리의 관심사가 아니니 여기는 우리의 삶의 터전이 아닌 까닭이다. 주님께서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고 명쾌히 선언하신 그대로다. 우리가 받는 고난의 "가벼운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무거운 것을 우리에게 이룬다"-얼마나 고무되는 지적인가. 고난을 받으면 받을수록 영광이 중첩되어 쌓인다는 의미로도 해석해서 나쁠 것이 없다.

주님 친히 말씀하시기를, 그 날에는 "기뻐 뛰라(to leap for joy)!" 하셨다. 다 큰 어른 수염이 백발이나 나도 어린 아이처럼 껑충껑충 길길이 뛰라는 말씀이니 그만큼 굉장하고 엄청난 포상이 있음이다. 앞에서도 지적한 대로 포상을 바라고 우리가 무슨 일이든 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주시는 것이 그와 같이 말도 못하다는 것이므로 충분히 폭발적인 희열을 누릴 수 있게 됨이다. 그러므로 핍박을 받을 때나 지금 이 때에나 항상 이 말씀을 아로새겨 원기 백배, 의기 충천하여 넘치는 용기로 매사 하나님의 일에 임할 것이다.

그런즉 놀림과 조롱이 상대가 될 뿐 아니라 채찍질 등 신체적인 해를 입고 결박당하고 감옥에 들어가는 좋다, 돌에 맞아 피 흘림도 좋다, 톱으로 켜는 고통을 당해도 좋다, 얼마든지 오라, 실컷 오라는 것이다. 다 소화해낼 터이니까. 칼에 죽는 것은 물론이고 바깥 추운 데로 쫓겨나니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산중으로 암혈(바위 굴)과 토굴(흙의 움막집)에 유리 방황하는 판이 나도 다 좋다.

온갖 종류의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아도 좋다. 너털웃음을 웃어주리라. 삥그레 하여 주리라.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한다"(히 11:36-38). 진정 하하헤헤히히호호후후다. 요사한 웃음이 아니라 전천후 웃음이다. 세상 재미로서의 웃음이 아니라 원시(遠視)하고 투시(透視)함에서 오는 넘치는 희열과 평안함과 자신감이다.


노래(찬송)가 아니 터져 나올 수가 없다. 이런 것을 믿지 않으면 그럼 무엇을 믿는다는 말인가. 믿음은 가려서 믿는 것이 아니다. 하나를 믿으면 다 믿게 되어 있고 그 중 하나를 믿지 못하면 전체를 모조리 믿지 않는다는 명백한 증거다. 그리스도께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믿음이 바로 이런 것이다. 명심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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